어느날 갑자기 「스카우트」된 고상미(高想美) (1969년 12월 21일) 




69년 영화가의 행복한 신인 -「데뷔」와 동시 3편 겹치기 


최근 제작을 끝낸 『여인(女人)의 종착역(終着驛)』 (김응천(金應天)감독)에서 신선한 「마스크」를 뽐낸 고상미(高想美·20). 홍세미(鴻世美)·오수미(吳樹美)등 세기상사(世紀商事)가 내놓은 「미(美)」자 항렬의 셋째 신인이다. 본명은 고충금(高忠琴). 첫 작품이 나오자 마자 3편의 영화에 출연, 겹치기 출연 연습을 닦게 됐다. 69년 마지막에 행운을 잡은 재수 좋은 아가씨.  


「데뷔」부터가 순탄했다. 고상미(高想美)는 수천면의 경쟁자와 겨뤄야 하는 공개 「콘테스트」같은 것을 거치지 않았다. 같은 무렵에 「데뷔」한 김명진(金明珍·렌의 애가(哀歌)) 윤연경(尹姸景·무영탑) 오수미(吳樹美) 등 신인은 까다로운 「콘테스트」를 거쳤지만 고상미만은 『배우될 생각도 안했는데』 갑자기, 극히 우연스럽게 「스타」가도에 나오게 됐다. 


『친구와 어울려 영화사에 들렀다가 그 곳 고위층과 감독의 눈에 띈게』 수속의 전부.  


그러면서도 고상미는 『마검(魔劒)』(임원식(林元植)감독) 『태양(太陽)은 늙지 않는다』 『나이프·장(張)』(두편 모두 권영순(權寧純)감독)에 주연, 기염을 올리고 있다.  


『마검(魔劒)』에서는 남궁원(南宮遠)을 상대역으로 하고 『태양(太陽)- 』『나이프- 』에서는 박노식(朴魯植)·김지미(金芝美)와 공연. 「멜로드라마」인 「데뷔」작품을 포함해서 두편의 「멜로」와 두편의 「액션」 영화를 「데뷔」 몇 달 사이에 해내는 셈이다.  


『스스로 예쁘다고 생각한 일은 없어요』로 시작해서 자신이 지나 온 얘기를 거침없이 쏟아놓는 품이 퍽 활달한 성격의 아가씨. 용모 역시 「순진·가련」에 그치는 정적인 미모가 아니고 어떤 활력을 느끼게 하는 매력을 갖고 있다. 다음에 고상미 자신이 말하는 대로의 이력을 더듬어 보면- 


무용경력이 8년-서울産인 그는 숭의(崇義)여중 3학년 때부터 고전무용을 익혔다. 무용가 김문숙(金文淑)씨한테 3년 가량 사사했고 67년엔 일본 「라이온즈·클럽」의 초청으로 「도꾜」등 대도시 순회공연을 1개월가량. 귀국해서도 「워커힐」「코리어·하우스」등 초청공연에서 무용솜씨를 자랑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탄탄하고 비교적 굵은 지체(肢體)를 갖고 있다. 영화 『여인의 종착역』에서 그는 대담하게 옷을 벗고 이 굵직한 팔 다리를 자랑했는데 감독이 노린 점이 바로 이 풍만한 지체미(肢體美)였던 듯. 신인의 청순성과 「섹스·어필」의 공존이 「에로티시즘」에 박차를 가했을건 뻔하다.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는 연극 연출가 이진순(李眞淳)씨에게서 연기공부를 했고 승마·운전 등 연기에 필요한 기술을 배웠다. 작곡가 박시춘(朴是春)씨를 찾아가 노래 공부도 했고 현재 취입은 안했지만 노래 솜씨는 「프로」급이라고 자화자찬.  


그런가 하면 69년 4월엔 TBC-TV의 「탤런트」시험에도 응모하여 현직 「탤런트」의 명함을 갖고 있다. 1천여명 응모자중에서 뽑힌 TBC 8기 「탤런트」 15명중의 한 사람.『「여인의 총작역」은 시사회를 할때마다 모두 봤어요. 처음엔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다시 한다면 그보다 훨씬 잘할 것 같아요』 


「누드·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것이 후회된단다. 『이왕이면 좀 더 아름답게 할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서도 어려운건 「누드」나 정사「신」이 아니고 『감정을 어떻게 빨리 얼굴 표정에 떠올리느냐는 것』이었다고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그래서 집에 돌아가서는 거울을 상대로 자신이 해낸 연기를 모조리 재연해 봤단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앞으로 3편쯤 해보면 첫 작품처럼 어색한 대목은 없어질 것이라고 자위한다. 


현재 한양대학교 무용과 2학년에 재학중인 高양은 영화계가 『막상 들어와보니 너무 복잡한 일이 많다』고 그 나름의 고충을 털어 놓았다. 


연기연습, 영화출연하는 일 이외에 신경써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서울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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