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철
이순철 SBS스포츠 해설위원이 스포츠서울과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상암ㅣ최민지기자 julym@sportsseoul.com

‘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최민지기자] 선수 유니폼을 벗은지도 30년이 지났다. 2000년대생 선수들이 KBO리그에 속속 등장하는 요즘 ‘세월이 참 빠르구나’를 되뇌일 수밖에 없다. 20대에겐 어쩌면 해설가로 더 유명한 이순철(57) SBS 스포츠 해설위원의 이야기다. 은퇴 후에도 지도자로, 해설가로 야구 인생을 이어가고 있는 이 위원을 만나 추억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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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왕과 함께 총 5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이순철. 스포츠서울DB

타이거즈의 유일한 신인왕

연세대를 졸업한 이 위원은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해 프로야구 최초의 ‘왕조’ 구축에 크게 이바지했다. 해태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레전드 선동열과 이종범도 못해본 타이거즈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신인왕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데뷔 첫 해 주전 3루수 자리를 꿰차고 99경기에서 타율 0.304, 12홈런, 50타점, 31도루를 기록했다. 이 위원 이후 지난 시즌까지 타이거즈에서는 신인왕이 배출된 적이 없다.

예상보다 훨씬 길어지는 ‘유일’의 타이틀에 이 위원은 “이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다”며 자부심보다 아쉬움을 크게 드러냈다. 이어 “‘유일하다’는 단어가 없어져야 한다. 누군가 나와줘야 하는데 아직 등장하지 않아서 아쉽다. 그동안 광주에서 야구를 잘하는 선수가 많이 배출됐는데 운이 좋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고 또 다른 팀으로 가버리거나 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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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하고 있는 이순철. 1991. 01. 18. 스포츠서울 DB

신인왕을 거머쥔 첫해를 시작으로 이 위원은 해태의 붙박이 1번타자로서 세 번의 도루왕과 5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특히 외야와 내야에서 모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기염도 토했다. 이 위원은 1986년 한대화의 입단으로 외야수로 전향했고 중견수 수비에 있어서는 역대 최고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라면수비(동네 슈퍼에 라면을 사러 가는 것처럼 편하게 수비한다는 뜻)’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다.

수비 능력을 타고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피나는 노력이 뒷받침됐다. 이 위원은 “과거에는 타자들의 타구 방향에 대한 데이터가 없었다. 타자들이 훈련하는 것을 직접 보고 타구 방향을 머릿속에 입력시켜야 했다. 혼자서 그런 과정을 통해 수비 위치를 조금씩 바꿔가면서 훈련했다. 뒤로 돌아서서 타구음만 듣고 공이 어느 쪽으로 떨어질지를 가늠하는 훈련도 많이 했다. 그 덕분에 어려운 타구도 쉽게 처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때 경험을 바탕으로 은퇴 후 코치를 할 때도 타구 방향 조정은 수작업으로 진행했다.

현역 시절 이 위원은 호타준족의 대명사였다. 단순히 리드오프로서 안타를 많이 치고 나가기 보다 장타력을 과시하며 스스로 해결하는 완성형 리드오프에 가까웠다. 최다안타와 도루왕을 석권한 사람 중 20홈런-20도루를 이룬 선수는 이 위원이 유일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 위원은 장타력을 키울 수 있던 원동력으로 ‘트럭 타이어’를 꼽았다. 그는 “일본 야구에서 온 문화였는데 당시엔 12톤 트럭 타이어를 방망이로 많이 쳤다. 때리면서 임팩트 되는 순간에 힘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체격이 크지 않았고 경기수도 적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덕분에 홈런을 좀 많이 친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요즘엔 그렇게 길에서 타이어를 쳤다가는 큰일난다”고 경고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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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전 9회초 왼쪽담장을 넘기는 솔로홈런을 날린 해태 이순철(오른쪽)이 서정환 코치의 환영을 받으며 홈인하고 있다. 1994-05-19. 스포츠서울DB

◇ 이종범의 등장, 그리고 은퇴

은퇴 후 30년이 지난 2018년 그 시절을 평가하면 스스로 몇 점을 줄 수 있을까. 이 위원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현역 시절의 나는 60점 정도인 것 같다”고 답했다. 그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기복있는 플레이가 많았다. 한 해 잘하고 한 해 못하고 했는데 꾸준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 위원은 현역 시절 타율 기복이 좀 심한 편이었다. 좋은 시즌에는 3할을 어렵지 않게 쳐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2할대 중반까지 하락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통산 타율은 0.265로 레전드급 선수 치고는 높지 않은 편이다.

기복있는 타율에도 불구하고 톱타자로서 존재감 가득했던 이 위원이지만 1993년 이종범의 등장으로 팀 내 입지가 급격히 좁아졌다. 이 위원은 “너무 훌륭한 후배가 나타나서 허탈감도 좀 있었다. 나이를 먹어가면 어쩔 수 없이 내리막을 걷지만 허탈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그래도 이 위원은 이종범과 함께 현역 시절 마지막 우승컵을 들어올렸던 1996년을 최고의 시즌으로 꼽았다. 그는 “선동열, 김성한 선배 등이 다 나가면서 모두가 우리를 꼴찌 후보로 꼽았다. 그 해 4월까지 꼴찌하다가 5월부터 치고 나가 결국 우승까지 했다. 한국시리즈를 많이 경험해봤지만 그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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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순철이 8일 친정팀 해태와의 경기에서 뜻밖의 포수로 나와 눈길. 9회말 포수 김 영진의 대타로 출장했다가 경기가 연장전으로 넘어가자 어쩔 수 없이 10회초 수비에서 미트를 들고 마스크를 썼다.팔방미인 선수답게 이순철은 2이닝 동안 용병투수 파 라를 리드해가며 7타자를 상대로 1안타만 내주는 성과를 거뒀다. 1998-08-09. 스포츠서울DB

이 위원과 해태의 마지막은 그닥 좋지는 않았다. 이 위원은 1997시즌을 끝으로 해태에서 방출됐고 삼성 유니폼을 입고 98시즌 한 해 동안 활약한 뒤 은퇴했다. 다소 아쉬운 선수 생활 마무리에 그는 “너무 한 팀에 오래 있었다는 아쉬움이 컸다. 30대 초반을 넘어선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다른 팀을 경험했다. 마지막에 삼성에서 1년 뛰다가 은퇴했는데 그게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요즘도 팀을 옮기는 것에 대해서 팬의 원성과 아쉬움이 따르지만 그 당시엔 지역감정까지 더해져 팀을 옮기는 게 훨씬 어려웠다. 이 위원은 “리그 활성화를 위해서는 팀을 옮기는 게 나쁘지 않다고 본다. 지금도 숨어있는 선수들이 많다. 그런 선수들이 트레이드 많이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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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이 창간된 1985년 신인왕을 차지한 이순철 SBS스포츠 해설위원이 소중하게 간직해둔 추억의 한 페이지를 꺼내보이며 환하게 미소짓고 있다. 제공 | 이순철 해설위원

◇ 그때와 지금, 변한 것과 그대로인 것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한 이 위원은 은퇴 후에도 여전히 지도자로서, 또 해설위원으로서 야구와 함께 하고 있다. 질릴 법도 하지만 이 위원은 “야구란 삶의 일부다. 모든 것이 야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질리지도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현역 때나 지금이나 야구에 대한 욕심만큼은 여전하다. 이 위원은 “야구에 대한 욕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나는 선수들이 팬에게 고급야구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현역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다. 내가 해설할 때 비판적으로 얘기한다고 하는데 프로야구 선수는 그게 직업 아닌가. 훈련을 소홀히 하고 실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일찍 도태될 테고 꾸준함도 없어진다”며 확고한 소신을 드러냈다.

그 연장선에서 이 위원은 아마추어 야구도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위원은 “선수가 많다보면 야구 수준은 반드시 올라가게 돼 있다. 아마추어에서 기본기를 잘 닦고 올라오면 좋은 선수가 되는 길이 빨라진다. 국내 야구는 인프라가 많이 부족하다. 야구를 하는 고등학교가 100개 정도는 돼야 한다. 초등학교 리틀 야구단은 많은데 특히 중학교 팀이 부족하다. 최소 100개 씩은 되야하지 않겠나. 야구인으로서 그런 바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지금은 경험할 수 없는, 그때만 경험할 수 있던 추억에도 잠시 잠겼다. 이 위원은 과거와 현재 프로야구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이 뭐냐는 물음에 “과거에는 야구장에 어린 아이들이나 여성팬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8:2수준이었는데 요즘은 거의 5:5다. 연령·성별 상관없이 즐기는 스포츠가 됐다는 점이 좋은 것 같다”고 답했다. 이어 “당시엔 지역감정도 심해서 외야수들은 오물 투척에 대비해 헬멧을 쓰고 경기한 적도 있다. 경기가 끝난 뒤엔 소위 닭장차(의경이나 기동대 버스)를 타고 호텔까지 간 기억도 있다”며 추억 여행을 마무리지었다.

julym@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