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김대령기자]'카우보이'. 거스 히딩크 감독은 안효연(40)을 이렇게 불렀다. 황야를 홀로 누비는 듯한 거침없는 돌파가 마음에 든다며 지어준 별명이었다.


그의 축구 인생도 거친 카우보이의 삶과 비슷했다. 안효연은 프로 무대를 밟기 전인 동국대학교 시절부터 이미 성인 대표팀과 올림픽 대표팀을 오가는, 태극 마크가 익숙한 선수였다. 말 그대로 '한국 축구를 이끌 재목'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른 나이부터 혹사 속에 고질적인 허리 부상을 안으면서 프로 선수가 된 후에도 중요한 시기마다 발목을 잡혔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도, 2002년 한일 월드컵도 대회 직전에 부상을 당하며 기회를 놓쳐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동국대학교에서 만난 안효연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라면서도 "긍정적인 성격이라 후회하며 과거를 붙잡고 있는 성격은 아니다"라고 웃으며 선수 시절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냈다.


◇뜨거웠던 '안효연 모시기' 스카우트 경쟁, 교토가 승리한 이유


본격적으로 안효연이라는 이름이 각인된 대회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1997년 국제축구연맹(FIFA) 세계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현재 20세 이하 월드컵). 이관우 박진섭 김도균 심재원 등 '황금 세대'로 불린 쟁쟁한 선수들을 앞세운 한국은 대회 직전 평가전에서도 선전하며 기대감을 높였지만 조별리그에서 프랑스와 브라질에 2-4, 3-10으로 패하면서 '쿠칭 쇼크'라는 오명을 쓴 채 대회를 마감하게 됐다.


안효연은 "프랑스나 브라질과 먼저 경기를 했다면 남은 경기를 조금 더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기회를 엿볼 수 있었을 것이다. 첫 경기에서 남아공을 만나 비기면서 꼬였다. 비겼지만 경기력이 좋았기에 남은 두 경기에서 한껏 공격적으로 나섰다가 대패했다"라며 패인을 짚었다. 이어 "대학교에서 공 좀 찬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세계의 벽을 실감했다. 당시 프랑스에 티에리 앙리와 다비드 트레제게가 뛰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있을 정도로 정말 잘했다"라고 회상했다.


첫 올림픽 무대가 되는 듯 했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그의 이름 세 글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회 직전 부상을 입으면서 출전이 좌절됐기 때문이다. 안효연은 대회를 앞두고 선수 실험이 계속되던 올림픽 대표팀에서 박진섭 등과 함께 4, 5명에 불과했던 '고정 멤버' 중 한 명이었기에 팀에도 큰 손해였다.


원인은 허리 부상. 이 허리 부상은 선수 생활 내내 안효연을 괴롭혔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계속 쉬지 못하고 경기를 뛰었다. 결국 3학년때 허리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계속 아프더니 결국 4학년때 올림픽을 앞두고 사달이 났다"라고 전했다. 이어 "병원에 갔더니 디스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은 사실상 선수 경력에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결국 치료만 받고 끝냈다"라고 덧붙였다.


이때 부상은 프로 입문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한 경기에 나를 보러 스카우터들이 4, 5명씩 왔다. 용돈을 주면서 팀으로 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상 당시 K리그 모든 팀이 나의 영입에 뛰어들었다"라고 운을 뗀 후 "그런데 부상을 당하니 나를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안효연 끝났다'라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들려왔다"라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이어 "부상에서 회복해 폼을 찾으니 다시 나를 향한 관심이 커졌다. 아팠을 때 쳐다보지도 않던 팀들이 잘하니 다시 찾아온다고 생각하니 뭔가 서운했다"라며 "그때 일본 제프 유나이티드에서 강화부장이 찾아왔다. 우연히 같은 날 교토 상가 강화부장도 찾아왔다. 오전과 오후로 나눠 두 사람과 모두 만났다. 제프는 1부였지만 1년 계약을, 교토는 2부였지만 2년 계약을 제시했다. 내가 고민하자 교토에서 더 높은 금액을 불렀다. 6개월 먼저 박지성이 교토에 몸을 담고 있다는 점도 나의 선택을 교토로 이끌었다"라고 프로 첫 팀을 교토로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그렇게 그는 2년 계약 총액 약 14억 원이라는 특급 대우를 받고 일본 무대에 진출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부상 아니었으면 가지 않았을까요?"


교토에 입단한 안효연은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거스 히딩크 당시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받았다. 실제로 그는 2001년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과 이듬해 열린 골드컵에 모두 출전하는 등 확실한 주전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히딩크 감독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월드컵 직전 히딩크 감독이 최종 명단을 두고 고민하며 평가전을 통해 마지막 옥석을 가리던 시기. 교토에는 두 장의 공문이 날아들었다. 박지성과 안효연을 평가전에 차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안효연은 강호 감바 오사카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던 팀을 돕기 위해 감바전을 뛰고 대표팀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인생을 바꾼 악수가 됐다.


안효연은 "월드컵 전에 일본에서 진짜 잘했다. 그땐 박지성보다 팬이 많았다(웃음). 2002년엔 1부리그로 승격했는데 그때도 몸이 좋았다. 그런데 대표팀 합류 전 마지막 경기에서 허리로 그라운드에 떨어지면서 부상이 와서 결국 수술을 했다. 월드컵 첫 경기를 병상에서 봤다"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부상이 아니었다면 월드컵에 갔을 수도 있을 것 같다"라면서도 "그래도 긍정적인 성격이라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과거에 연연하진 않았다. 김남일과 박지성이 대회 중 병문안을 와서 아픈 몸을 이끌고 함께 놀기도 했다"라고 뒷이야기를 전했다.


◇"부산에 남으면 프리미어리그도 보내주겠다"


이때 당한 부상은 커리어에 큰 변곡점이 됐다. 부상 후유증이 길어지자 교토도 외국인 선수를 오래 기다려주진 못했다. 결국 교토를 떠난 그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몸 상태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은퇴까지 고민했다. 그때 손을 내민 것이 고(故) 이안 포터필드 당시 부산 아이콘스 감독이다.


안효연은 "포터필드 감독님이 내 영상을 보고 무조건 데리고 와달라고 했다고 하더라"라며 "입단 후 감독님이 개인적으로 재활 트레이너를 영국에서 데려와 내게 붙여줬다. 구단에서 이때 거의 매달 2000만 원 정도를 쓴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포터필드 감독이 그에게 당근만 준 것은 아니었다. 안효연의 몸이 정상 궤도에 오르던 2004년 그의 정신 상태가 해이해졌다고 판단한 포터필드 감독은 그를 '조련'하기 시작했다. 연습 경기에서 안효연을 제외한 모든 선수를 기용하기도 했다. 그는 "그저 묵묵히 훈련에 임했다. 다섯 경기 정도가 지나니 내게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정신 무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 후로는 '포터필드의 아들'이 됐다"라며 웃었다.


그해 FA컵 준결승전에서 울산을 상대로 4골을 폭발시키는 등 맹활약한 안효연은 여러 팀의 러브콜을 받았다. 포터필드 감독은 "네가 잔류하면 내년이든 내후년이든 프리미어리그에 보내주겠다. 넌 무조건 통한다. 이미 영국의 지인에게 전화해뒀다"라고 이야기하며 잔류를 설득했지만 그의 마음은 수원으로 기울었다. 그는 "그땐 프리미어리그에 대한 열망이 큰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 진출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 말이 큰 유인이 되진 못했다. 그런데 몇 년 뒤부터 프리미어리그 붐이 일더라"며 웃었다.


◇화려한 데뷔, 조용한 은퇴


이후 수원과 성남, 전남을 거친 안효연은 요코하마FC를 거쳐 이임생 감독의 부름을 받고 싱가포르의 홈 유나이티드로 향했다. 그는 "요코하마 시절은 축구에 눈을 뜬 때였다. 재미있게 축구를 했는데 감독이 바뀌면서 상황이 틀어졌다"라며 "계약을 해지한 후 한동안 놀았다. 술만 먹고 지내다 보니 답답했다. 그때 손을 내민 게 이임생 감독"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타지에서도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첫 경기에서 상대 선수와 충돌해 허리 부상을 당하면서 어이없게 싱가포르를 떠났다. 그렇게 3개월을 또 한국에서 쉬던 중 이번엔 인도네시아 쪽에서 연락을 받고 다시 새로운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후 약 2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 마음 편히 축구를 한 뒤 조용히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과거는 과거로 남겨두는 성격의 안효연이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고 했다. 그는 "수원이든 성남이든 한 팀에서 오래 있지 못한 점은 아쉽다. 두 번째 수원을 떠날 땐 차범근 감독님이 함께 더 해보자고 했지만 더 많은 기회를 잡으려 이적을 택했다. 결과적으론 아쉬운 선택이 됐다"라고 털어놨다.


은퇴식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그는 "얼마전 (이)영표 형을 만났는데 은퇴식을 대표팀에서, 미국에서, 서울에서 총 세 번 했다고 하더라. 난 한 번도 못했는데 아쉽긴 했다. 만약 한 팀에서 오래 뛰었으면 해주지 않았을까"라며 아쉬워했다.


◇감독이 될 줄 몰랐던 감독


사실 안효연은 선수 시절 지도자의 길을 걷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은퇴 후 사업을 준비했는데 조금 잘못됐다"라고 쓴웃음을 삼킨 후 "그때 한 후배가 '형이 제일 잘하는 걸 하라'라고 조언해줬다. 그래서 개인 축구 레슨을 해봤다. 아이들이 가르침을 받고 느는 걸 보니 '내가 능력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다시 축구계로 돌아오게 된 계기를 이야기했다.


마침 당시 용호고등학교를 이끌던 임종헌 감독이 기회를 줬다. 정식 코치는 아니었지만 임종헌 감독을 보좌해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경험을 발판삼아 지난해에는 동국대학교의 지휘봉을 잡았다.


감독이 된 안효연은 "지키는 축구, 획일화된 축구가 아닌 재미있는 축구, 신선한 축구를 하고 싶다"라며 "선수 시절엔 기술이나 드리블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선수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르친 선수들이 '공을 안효연과 비슷하게 찬다'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도록 열심히 지도하겠다"라고 철학을 전했다.


나아가 "언젠가는 박항서 감독님처럼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대표팀을 이끌고 성공을 거두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라는 포부를 밝힌 그는 "감독 안효연이 지도자로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다"라며 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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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ㅣ스포츠서울DB, 김대령기자 daeryeong@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