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글‧사진 이용수기자] 작은 고추가 더 맵다. 이는 몸집이 작은 사람이 큰 사람보다 더욱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의미하는 속담이다. '한국 레슬링의 전설' 심권호(45)는 작은 몸집으로 전 세계 레슬링을 석권했다. 특유의 꾀돌이 같은 머리와 유연한 기술로 한국 레슬링에 큰 획을 그었다.


1990년대 '레슬링'하면 떠올랐던 심권호는 지도자와 해설위원을 거쳐 예능 프로그램에도 얼굴을 자주 내비치며 레슬링의 대중화에 힘썼다. 지금은 야인(野人)으로서 한국 레슬링의 밝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지난 2010년 현역 시절 소속이었던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입사해 회사원으로 생활하는 심권호는 현재 LH공사 인천지역본부 경영지원부에서 사회공헌에 힘쓰고 있다. 한국 레슬링에 한 획을 그은 그의 영광스러웠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심권호가 바라 본 안타까운 한국 레슬링의 현재


심권호는 혼자만의 힘으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48kg급과 54kg급을 석권하며 대한민국 최초이자 그레코로만형 선수로는 아시아 최초로 지난 2014년9월 국제레슬링연맹(FILA) 선정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그의 레슬링 기술은 독보적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한국 레슬링 시스템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 기술을 전수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선수들이 운동시간에 집중할 수 없는 구조다. 코트 위에서 몇시간 서 있을 수 있는 체력을 기른다며 체력운동을 많이 한다. 해외의 경우 오전과 오후 두 차례만 운동하는데, 우리나라는 새벽 운동도 있고 코트 밖에서 근력 운동까지한다. 기술 중심의 운동이 아니라는 소리다. 체력운동으로 힘 다 빼놓은 상태에서 기술훈련을 한다면 무엇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겠는가. 그게 의문이다. 기술이 부족하다보니 우리나라 레슬링의 세계 경쟁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심권호는 현재 한국 레슬링 시스템에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폐쇄적인 문화 탓에 기술 발전이 어려운 상황을 꼬집었다.


"한국 레슬링은 폐쇄적이기 때문에 기술 발전이 없다. 내가 후배를 보고 자세를 조금만 수정하면 괜찮을 듯 싶어 가르쳐줘도 해당 후배의 지도자가 내게 기술을 가르치지 말라고 한다. 내가 기술을 전수하려 해도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해당 제자를 가르치려 한다. 또 한국 레슬링은 체력만 기르고 기술은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는 것만 연습한다. 그러니 세계 경쟁력에서 계속 밀리는 것이다."


◇'작은 거인' 심권호, 두 체급 그랜드슬램 달성할 수 있던 비결


심권호는 레슬링 선수들이 평균적으로 운동을 시작하는 중학교 1학년 때 운동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그로부터 1년 후지만 그의 재능을 높게 본 체육 선생님의 눈에 띄어 레슬링을 시작하게 됐다. 당시 그는 또래에 비해 팔 힘이 강했다. 특히 끌어당기는 힘이 좋았다. 어린 나이에도 심권호가 또래에 비해 힘이 좋았던 건 주변환경 덕분이었다. 지금의 신도시가 개발되기 전 성남에 살았던 그는 산을 뛰어다니며 놀았고, 덕분에 단단한 몸을 지닐 수 있었다. 하지만 좋은 신체를 지녔다고 모든 선수가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가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48kg급과 53kg급에서 그랜드슬램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은 따로 있었다. 바로 잡초 같은 근성 덕분이었다.


"나는 학연, 지연 없이 스스로 일어서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내가 운동할 당시만 해도 학연, 지연이 있었다. 대회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얻어도 '너는 안 될 거야' '반짝하고 말 거야' 등 부정적인 평가 밖에 듣지 못했다. 오히려 나보다 못한 선수를 주목하고 칭찬했다. 그 때부터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잡초 같은 근성이 자라기 시작했다. 나는 운동을 하면서 어떤 대회를 치르든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대부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내가 여러 힘든 시련 속에도 버티고 운동할 수 있었던 건 국제대회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던 기억 덕분이다. '목표를 두고 열심히 하면 되는구나'라는 확신이 나를 버틸 수 있게 해줬다. 그 때부터 주위 시선을 생각하지 않고 내 방식대로 전진했다."


결국 심권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48kg급으로 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95 체코세계선수권대회, 96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차례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자신의 진가를 증명했다. 하지만 96 애틀란타 올림픽 이후 48kg급이 폐지되면서 심권호는 은퇴냐 체급 변경이냐의 기로에 놓였다. 그가 선택한 건 체급 변경이었다. 54kg급으로 변경한 그는 특유의 근성으로 두 체급 그랜드슬램을 이뤄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변의 시선도 여전했다. '너는 이제 끝났다' '어떡할 거냐?' 등 나를 은퇴한 것 마냥 취급했다. 하지만 난 내 몸을 잘 알았기에 기존 체급 변경 프로그램이 아닌 내 방식대로 천천히 체급을 변경했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해 2년간 조금씩 몸을 끌어 올렸다. 그 시절 좋았던 건 '심권호의 시대는 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나에 대한) 관심을 끊어주면서 조용히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는 거다. 덕분에 두 체급 그랜드슬램을 이룰 수 있었다. 이 모두가 '잡초' 같은 근성으로 운동한 덕분이다."



◇"방송에서 보여진 가벼운 이미지? 꾸밈 없는 나일 뿐"


심권호는 레슬링의 대중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 중 하나가 해설위원, 방송인으로 활동한 것이다. 그는 레슬링이 대중에게 보다 재밌고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해설위원의 길을 택했다. 그가 처음 해설위원을 시작했던 지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부터 비난을 받고 물러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까지 레슬링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처음 (해설위원)제의가 왔을 때 당황했다. '내 무엇을 보고 해설위원을 제안했지?'라고 의문을 품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방송국에서 수락해 시작한 게 해설위원 심권호의 모습이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 기억은 좋았다. 나는 거침 없이 내뱉었다. 선수와 관련한 에피소드, 기술적으로 관련한 여러 이야기를 했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메달을 딸 때는 반응이 좋았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2008 베이징 대회 때는 우리나라 성적이 좋지 않으니 내 해설 방식에도 부정적인 시선이 많아지더라. 지금은 다양한 해설위원이 나왔지만 그 당시만해도 얌전한 해설이 정석이었다. 그래서 나는 소리도 지르고 선수 뒷담화를 얘기하는 게 재밌을 거라고 생각해서 했던 것인데 너무 앞서 나간 것이었다. 시청자가 레슬링을 보다 쉽고 재밌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했던 것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 때는 인터넷 중계라도 해보려고 했으나 중계권 계약 때문에 포기했다. 만약 2020 도쿄올림픽 때 기회가 온다면 공중파보다 더 재밌게 방송할 자신이 있다."


심권호는 해설위원 외에도 방송인으로도 활약해 왔다. KBS2 '출발 드림팀' 등에서 체육 예능인으로 활동하며 서슴 없이 망가졌다. 그의 친근한 이미지는 전부 이 때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방송이라고 해서 거짓으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방송에서 보여진 모습이 내 모습 전부다. 방송에서 보여진 게 가벼운 이미지라기보다 사람들이 좀 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운동한 사람이기에 자칫 어렵게 생각하고 거리를 둘 수 있다. 그러나 친근한 동네 아저씨 같은 이미지를 심어준 덕분에 내가 LH공사에서 근무할 때 쉽게 사람들과 친해지고 적응할 수 있었다."



◇심권호만의 방식으로 한국 레슬링의 미래 이끌겠다


현역 시절 몸담았던 LH에서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마친 심권호는 레슬링판에 더 몸담기보다 사회인으로서 제2의 삶을 선택했다. 그는 지난 2010년 LH에 입사해 현장에서 고객을 상담하는 등 일반 사원과 똑같이 근무했고 지금은 인천지역본부 경영지원부 부장의 자리에 올랐다. 일반인의 삶을 사는 심권호지만 레슬링을 포기한 건 아니다. 그는 회사의 배려 속에 레슬링을 놓치 않고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고 있다.


"회사의 배려 덕분에 내 능력을 살려 일하고 있다. 양로원에서 노년층에게 관절 테이핑법을 가르쳐주고, 불우한 환경의 어린이들에게 레슬링을 가르쳐 새로운 꿈을 심어주는 등 내가 할 수 있는 능력껏 지역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


한 때 대한레슬링협회 이사로도 지냈던 심권호는 이제 '야인'으로서 한국 레슬링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건 레슬링 아카데미를 준비해 지금껏 전수하지 못한 기술들을 알려주고 한국 레슬링의 도약을 기대하고 있다.


"일본 레슬링과 교류하면서 후배와 함께 아카데미를 준비하고 있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내 나름의 방식으로 한국 레슬링에 이바지하고 싶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배우고자하는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한국 레슬링이 밝은 미래로 걸어나갈 수 있게 돕고 싶다."


purin@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