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글·사진 스포츠서울 김대령기자]해설위원 겸 리포터로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현장을 누빈 조해리는 밝은 미소와 쾌활한 목소리로 빙상장을 환하게 밝히며 등장할 때마다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점령하는 등 큰 사랑을 받았다. '해리포터(조해리+리포터)'라는 귀여운 별명까지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환한 미소 뒤에는 숱한 좌절의 역사가 있다. 때로는 부상으로, 때로는 억울한 판정으로 피눈물을 삼켜야 했던 그는 지난 세 번째 올림픽 도전이었던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야 금메달을 목에 걸며 칠전팔기의 신화를 썼다. 평창에서 후배들을 보듬고 격려하던 그의 모습이 더 아름답고 값졌던 이유다.


한반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평창 올림픽이 끝난 후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 조용히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조해리를 고양어울림누리 빙상장에서 만났다.


◇시련의 시작, 토리노


조해리가 스케이트화를 처음 신은 건 초등학교 1학년. 한강 둔치의 겨울방학 특강 프로그램에서였다. 그는 "칼날이 얼음 위를 미끄러지며 빠르게 질주하는 기분이 정말 신기했다"라며 처음 빙상을 갈랐던 당시를 회상했다.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조해리는 주니어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출전을 노려볼 수 있는 실력까지 올라섰지만 1986년 7월 29일생이었던 그는 1986년 7월 1일 이전 출생자에게만 출전을 허락하는 올림픽 나이 규정에 걸려 출전하지 못했다.


특히 절친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동갑내기 고기현은 솔트레이크행 비행기를 탔기에 아쉬움도 있었을 터. 하지만 조해리는 "애초에 규정상 출전이 불가했기에 특별히 좌절하거나 친구를 질투하지도 않았다. 다음 올림픽을 기약했다"라며 "고기현을 열심히 응원했고, 메달을 땄을 때 함께 기뻐했다. 지금도 친하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은 조해리의 첫 올림픽 무대가 되지 못했다. 올림픽으로 가는 관문인 2차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부상을 입으면서 낙마했다. 그는 "선수 생활 중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대로 컨디션 관리를 못한 내 탓도 있었지만 중요한 순간에 부상을 당해 그땐 심리적으로 크게 흔들렸다"라고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토리노만 보고 달려온 조해리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몸도 마음도 성치 않았던 그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모지수(現 고양시청 빙상팀 감독) 코치와 부모님이었다. "그 정도로 힘들 땐 사실 주변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라고 운을 뗀 그는 "그런데 부모님은 강압적으로 채찍질하는 타입이 아니다. 계속 내게 힘을 불어넣어 줬고 이는 내게 든든한 버팀목으로 작용했다"라고 감사함을 전했다.


◇부상 악령 물리쳤지만…. 시련과 눈물의 밴쿠버


부상 악령은 이후에도 조해리를 괴롭혔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목표로 재설정한 조해리는 다시 스케이트화 끈을 동여매고 구슬땀을 흘렸지만 크고 작은 부상이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이에 관해 묻자 "하도 부상을 자주 당해서 언제 어떤 부상을 입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미소를 지으며 한 말이었지만 힘들었던 그의 선수사(史)가 그대로 녹아있는 말이었다. 이어 "6개월을 쉬면 그 두 배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제 컨디션이 돌아온다"라며 "부상으로 아파서 힘든 게 아니라 체중 관리와 컨디션 조절, 그리고 이로 인한 후유증이 더 힘들다. 뛸 만하면 부상이 오고 다시 몸을 만들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힘들었다"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4년이 지나 어느덧 올림픽의 계절이 돌아왔다. 정신력으로 부상을 이겨낸 조해리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하며 꿈에 그리던 올림픽 무대를 밟게 됐다. 그는 "'조해리는 끝났다'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땅바닥을 친 선수였으니까. 그래서 더 힘을 냈다"라고 당시 심정을 밝혔다. 이 정도로도 '인간 승리'의 스토리가 쓰이기엔 충분한 듯했다. 그러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부상이 아닌 판정이 조해리를 울렸다. 김민정, 박승희, 이은별, 조해리가 뭉친 한국은 3000m 계주에서 최고 전력을 자랑하던 중국을 제치고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하고도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다. 김민정이 중국의 쑨린린의 주로를 방해했다는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실격 처리됐기 때문이다. 그는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쏟아지던 함성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은 후 "판정이 이상하게 길어졌다. 애매한 상황이 있다는 뜻이니 불안감이 엄습해왔고 안좋은 예감은 현실이 됐다"라고 전했다.


국민은 분노했고 선수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8년을 기다린 조해리에겐 두 배의 상처였다. 심리적으로 완전히 무너지자 이 여파는 남은 1000m 개인전에서도 이어졌고, 결국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한 채 귀국해야 했다.


◇12년 만에 목에 건 金…. 해피엔딩 완성한 소치


밴쿠버에서도 이미 베테랑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던 조해리는 이제 "다음 올림픽에서 잘하면 된다"라고 자신을 위로할 수도 없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은 출전 자체가 불가능을 향한 도전이었다. 잦은 부상으로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치고 올라오는 어린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두 배의 노력을 해야 했다. 모두가 조해리의 은퇴를 예상하던 그때 거짓말처럼 전성기가 찾아왔다.


가장 큰 변화는 마음가짐에 있었다. 그는 "극한의 식단 조절에 돌입한 것은 물론 친구도 만나지 않고 개인 시간을 줄여가며 연습에 매진했다"라며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은 마인드다. 이전까지는 경기에 나설 때마다 1등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고 시련이 닥치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질까'라고 생각했다. 밴쿠버 이후로는 목표에 숫자가 없어졌다. '후회만 없게 타자' '이 정도면 잘했다'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라고 밝혔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무장한 조해리의 질주는 부상도 막지 못했다.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무릎 부상을 당했지만 이를 딛고 같은 해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개인종합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예전 같았으면 '또 나만 부상을 당했다'라며 좌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재활했다"라고 뒷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렇게 세 번째 올림픽의 길이 열렸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는 "밴쿠버 이후 '내가 다시 스케이트화를 신고 다음 올림픽에 도전한다는 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다. 나보다 어린 선수도 은퇴하고 제2의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라며 복잡했던 마음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기우였다. 인간 조해리의 12년에 걸친 도전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었다. 소치에서 공상정 박승희 심석희 김아랑과 함께 계주 금메달을 따냈다. 그는 "힘든 훈련에 모두가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결과적으론 이 노력들이 열매를 맺어 좋은 결과를 얻어냈다.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라고 당시의 환희를 실감나게 전했다.


은퇴 후 조해리는 고양도시관리공사에서 행정 업무를 담당하며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동시에 해설위원으로서 팬들과 만나고 있다. 인터뷰에 임하는 날도 퇴근 후엔 중계 준비를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올해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해설위원과 리포터를 겸임하며 현장을 누벼 선수 시절 못지않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해리포터'라는 별명도 여기서 생겼다. 그는 "해설위원이 현장 리포터로 나서는 게 빙상 최초였다. 참고해 공부할 것도 없고 먼저 경험한 선배도 없어 연구를 정말 많이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첫 방송에 임했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다"라고 큰 호응을 보내준 시청자들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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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ㅣ스포츠서울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