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박준범기자]김수경은 '현대 왕조의 황태자'로 불렸다. 1998년 데뷔와 동시에 신인왕을 차지하며 혜성같이 등장했고, 현역 시절 4개의 우승 반지를 꼈다. 2000년엔 18승을 거두며 공동 다승왕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김수경의 야구인생은 굴곡졌다. 투구 폼 변경과 부상으로 부진을 겪기도 했고, 또 34세에 이른 은퇴를 선언하고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코치로 부임한 지 1년 만에 독립야구단으로 뛰어들며 야구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그때를 떠올리며 "지금은 후회나 미련 없이 홀가분하다"는 김수경은 창원마산야구장에서 선수들과의 훈련으로 여념이 없었다.


◇인천소년, 현대 왕조의 주축이 되다


김수경은 데뷔 때부터 독특한 키킹 동작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는 "사실 제 투구 폼이 평범한 줄 알았다. 진짜 그런 줄 알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비디오를 녹화해서 우연히 보게 됐는데 처음엔 충격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중학교 때 키가 많이 안 커서 체격이 왜소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힘을 쓸 수 있는 폼을 던지게 된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다리를 들어도 탄력으로 들고, 팔보다는 하체를 더 이용하게 됐다"고 투구 폼에 대한 비화를 공개했다.


독특한 투구 폼을 가진 '인천 소년' 김수경은 1998년 고졸 우선지명으로 현대에 입단하게 된다. 그는 "인천이 아닌 다른 지역에 지명받았으면 낯설었을 텐데 다행히 어렸을 때부터 봐 왔던 팀이어서,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고 입단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그가 말한 대로 낯섦이 덜해서였을까. 김수경은 데뷔와 함께 당당히 현대의 선발 한 자리를 꿰찼다. 선발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운'이라고 정리했다.


그는 "당시에 저도 개인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현대가 워낙 투수 왕국이었고, 또 외국인 선수 제도도 생겼다. 그런 상황에서 신인이 몇 승을 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당시를 되돌아봤다. 그러면서 "어렵게 따라간 전지훈련지에서 희망을 본 게 선배들 중에 아픈 사람이 많았다. 내가 안 아프면 기회가 올 것 같았다"고 전하며 "그러다 일본 전지훈련 때 연습 경기하는 날이었는데, 나는 대기조였다. 가내영 선배가 투구하다 타구에 손을 맞았다. 그다음이 내 차례였는데 갑자기 마운드에 올라가서 삼진 3개를 연속으로 잡았다. 그렇게 귀국해서 시범경기도 나갔고, 시즌 시작해서도 4선발로 뛰었다. 운이 좋았다"라며 겸손함을 보였다.


◇함께여서 가능했던 신인왕·다승왕·우승


그렇게 선발진에 합류한 그는 정규리그에서 12승을 거뒀고, 한국시리즈에서도 2경기에 출전해 1승 1세이브 평균자책점 1.61을 기록하며 현대의 우승에 기여했다. 신인왕도 그의 몫이었다. 김수경은 자신의 뛰어난 활약의 공을 선배들에게 돌렸다. 그는 "내 야구를 한 게 아니라, 선배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박)경완(現 SK와이번스 배터리 코치)이 형이 '너하고 나는 타자를 상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다독였다. 경완이 형 뿐 아니라 선배들이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줬고, 선배들 행동도 배울 점이 많았다"고 현대에서 한솥밥을 먹은 선배들을 추어올렸다.


팀 우승과 신인왕을 차지한 그는 거침이 없었다. 김수경은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겁 없이 던졌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2000년에는 팀 동료이던 정민태-임선동과 함께 18승으로 다승 공동 1위에 올랐고, 현대 역시 '왕조'라 불릴 만큼 승승장구했다. 그는 현대가 강팀인 이유에 대해 "연패를 하거나 연승을 해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져도 '괜찮아. 할 수 있어'라는 분위기가 있었다"면서 "또 선배들이 팀을 잘 끌고 갔다. 팀이 따로 움직였던 게 아니라 선배들이 잘 끌고 후배들도 잘 따라갔다"고 전했다.


◇갑작스런 투구 폼 변경, 그에게 없었던 '만족감'


탄탄대로일 것 같던 김수경의 야구인생은 2001년 변곡점을 맞는다. 18승을 거둔 다음해인 2001년에 단 6승(6패)에 그친다. 원인은 투구 폼 수정이었다. 투구 폼 이야기에 그는 자세를 고쳐 잡은 뒤 "후회를 많이 하는 부분이다. 어렸고 무지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내 투구 폼이 다른 사람들보다 하체를 많이 사용한다. 그때 주변에서 하체를 많이 쓰면, 체력적으로 소비가 많이 되니. 야구를 오래 못한다고 이야기를 많이 했다. 18승을 했지만,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었다"고 회상했다.


투구 폼 변경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자 원래 폼으로의 회귀를 선언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김수경은 "폼을 바꾸다가 공이 예전만큼 안 나가서 원래 폼으로 돌아갔는데, 예전 느낌이 전혀 안 들었다. 그러다 팔꿈치 부상도 생겼고, 근력이 미세하게 바뀌면서 밸런스도 무너졌다. 가끔씩 '폼을 안 바꿨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한다"라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부상과 무너진 밸런스가 그를 괴롭혔지만, 그럼에도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거뒀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자릿수 승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10승을 하고 팀이 우승해도 스스로의 만족감은 떨어졌다. 은퇴하는 날까지도 그랬다. 출근 시간이 즐겁지 않았다"고 전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노력'은 절대 놓지 않았기에 그 정도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김시진 감독님이 저를 많이 안타까워하셨다"라고 김 전 감독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전했다.


현대는 2007년 시즌을 끝으로 해체 수순을 밟는다. 현대의 마지막 선발투수도, 마지막 승리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현대의 마지막 승리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FA 계약의 조건이 12승이었다. 그래서 내년을 보장받으려며 마지막 게임을 이겨야 했다. 그날 승리는 현대에도 나에게도 의미가 있었다"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털어놓았다.


10년을 몸담은 현대라는 구단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다. 그는 "현대라는 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게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제 야구인생에 굴곡이 많지만, 현대에서 선배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한테 도움을 받았고, 그런 팀이 계속 있었으면 좋았는데 오래 못 가 없어진 게 아쉽다"고 진심을 내비쳤다.


◇이른 은퇴→코치→다시 선수로


유니콘이 아닌 영웅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오른 김수경은 예전의 위용을 되찾지 못했다. 2008년 3승(6패), 2009년엔 6승(11패)에 그쳤고 2010년부터 2012년까지 그가 올린 승수는 단 1승이었다. 결국, 그는 2012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김수경은 "구단 쪽에서 코치 제의가 왔다. 고민하다가 선택하게 됐다. 당시에 구속도 안 나왔고, 다른 선수들과도 경쟁이 안 됐다"고 은퇴 배경을 밝혔다.


구단의 코치 제의를 수락한 김수경은 코치 생활을 이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부임 1년 만에 다시 선수로 출발점에 선다. 폼에 대한 콤플렉스와 배움의 의지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구단의 은퇴식 제안도 김수경을 붙잡지 못했다. 그는 "코치를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뭔가 배움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또 예전부터 김성근 감독님에게 한번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 시기를 놓치면 더는 도전할 수 없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후회나 미련 없이 홀가분하다"고 웃어 보였다.


2년여의 짧았던 두 번째 선수생활(?)을 마친 김수경은 2015년 11월 NC 다이노스 스카우트 코치로 부임한다. 투수코치가 아닌 스카우트는 그에게 생소했다. 그는 "처음엔 뭘 해야 할지도 몰라서 배우면서 힘들었다. 정해진 틀은 없고, 그 선수를 알기 위해서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해서 쉽지 않았다. 2년 정도 하면서 이제는 선수들을 판단하는 시야가 조금 넓어진 것 같다"고 만족스러워했다.


◇굴곡의 선수생활, 그만의 '철학'으로


2년여의 스카우트 코치를 거쳐 올해엔 NC의 퓨처스팀 투수코치를 맡아 선수들을 지도했다. 지도자 철학에 관련된 질문에 그는 한참을 고민한 뒤 조심스럽게 대답을 내놨다. 김수경은 "이제 코치 2년 차라서 부족한 게 많고 여전히 배워나가는 단계다. 어떤 계획이 서지 않는다"라고 전제하면서도 "투구 폼과 관련된 지도를 할 때 신중하게 하려고 한다. 섣불리 변경하면, 저 같은 사례가 나오지 않을 보장이 없다. 많은 변화보다는 신중하게 대화와 설득을 통해 하고자 한다"고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그는 "선수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면서 세심하게 챙기는 코치가 되고 싶다"면서 "선수들이 저보다 오래 야구 했으면 좋겠다. 롱런할 수 있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펼칠 수 있게끔 지도하려 한다"라고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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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l 스포츠서울 DB, 박준범기자 beom2@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