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수원 l 스포츠서울 박준범기자] 영국의 소설가 겸 시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당신이 무엇을 수확했는가에 따라 하루하루를 판가름하지 마라. 당신이 어떤 씨앗을 심었는가에 따라 하루하루를 평가하라"고 말했다. 눈에 보이는 결과보다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임을 말하는 듯싶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농구대잔치 세대'의 주역 중 한 명인 김훈(46)은 지난 2007년 10년의 프로 생활을 정리했다. 그리고 2009년부터 경기도 수원시에서 '김훈의 농구 교실'을 운영하며 농구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는 "유소년 농구는 프로라는 '열매'를 위해 '씨'를 뿌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아이들에게 승리보다는 재밌게, 즐겁게 농구하는 법을 가르치고 싶다"고 전했다.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1990년대 농구대찬지. 그리고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10년을 누빈 그에게서 나온 의외의 답변이었다. 당장의 결과보다 유소년 농구의 발전을 위해 10년째 힘쓰고 있는 김훈을 수원에서 만났다. 그는 '스마일 슈터'라는 자신의 별명답게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인터뷰에 임했다.


◇연세대 입학과 바꾼 '체육 교사'의 꿈


대전에서 초·중·고를 보낸 김훈은 1992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는 연세대는 물론이고 고려대, 중앙대 등 대학 농구가 '붐'을 일으키던 상황. 그는 다른 학교가 아닌 연세대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상범 감독님(現 원주 DB)이 저희 때에 우상 같은 분인데 연세대를 갔다. 이 감독님처럼 연세대에 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원래는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할 생각이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께 '체육 교사를 하겠다'고 공표를 했다. 아마 연세대의 제안이 없었으면, 체육 교사가 되려고 대학 진학을 했을 것"이라면서 "다른 대학들도 입학 제안을 했다. 그중 연세대의 제안이 가장 마지막이었는데, 이야기를 듣자마자 간다고 했다"고 연세대 입학 배경을 밝혔다.


◇연세대의 농구대잔치 우승 비결은 '분업 농구'


그렇게 운명적으로 연세대와 연을 맺은 김훈은 우지원, 이상민, 문경은, 서장훈 등 전설의 멤버와 함께 연세대의 1993~1994년 농구대잔치 우승에 일조했다. 농구대잔치 역사상 최초의 대학팀 우승이었다. 연세대의 일원이었던 그가 보는 연세대의 강점은 무엇일까. 김훈은 "분업 농구다. 각자 개인이 잘하는 것만 했다. 상민이 형은 어시스트를 열심히 하고, 저는 수비를 열심히 하면서 찬스가 나면 외곽슛을 쏘고, 장훈이는 리바운드와 골밑슛에 치중했다. 각자 맡은 바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 같다"고 평했다.


당시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스마일 슈터'. 경기장 밖에서든 안에서든 늘 미소를 지어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평소에도 잘 웃는 편이기도 한데, 무엇보다 멤버들이 마음에 들었다"면서 "연세대의 멤버 중 한 명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컸다. 계속 이기고, 좋은 팀에 있다 보니까 저 스스로 흐뭇해서 계속 웃음이 나왔던 것 같다. 버릇이라서 고칠 수는 없더라"면서 쑥스러워했다.


농구대잔치는 대학팀 뿐만 아니라 당시 실업팀이던 삼성전자, 기아자동차 등 내로라하는 선배들과의 맞대결도 많았다. 후배로서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의 대결은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김훈의 대답은 달랐다. 그는 "그때는 우리가 계속 이기니까 10분을 남겨놓고 10~20점 지고 있어도 어차피 이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담스럽지 않았고, 무서울 게 없었다. '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FA부상→이른 은퇴…"지금도 뛰는 꿈 꿔"


연세대를 졸업한 김훈은 인천 대우증권 제우스(現 인천 전자랜드)의 창단 멤버로 합류한다. 그리고 1997년 프로농구(KBL) 원년 개막전이라는 역사적인 현장에 자리한다. 그는 "그냥 신기했다. 프로가 아니고 세미 프로였다"면서 "쿼터를 나눠서 뛰니까 굉장히 (경기시간이) 길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본격적으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김훈은 세 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며, 맹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활약도 잠시, 2003~2004시즌부터 출전 시간이 절반으로 떨어졌고 자연스레 기록도 하락하고 만다. 그는 "프리에이전트(FA) 계약 전에 발목이랑 어깨를 다쳤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유했지만, FA 첫해에 아프다고 쉴 수가 없었고, 통증 주사를 맞으면서 뛰었다. 지금 돌아보면 잘못된 생각이었다"라고 자책했다.


그러면서 "1년 마다 감독님이 바뀌었고, 수술은 계속 미뤄졌다. 그때 받아야 했던 수술이 지금 오세근(안양 KGC 인삼공사) 선수가 받은 인대 재건 수술이다. 회복까지 최소 9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고 해서 더는 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수술하고 1년 정도 재활을 한 뒤에 뛰었으면 좋은 플레이를 했을 텐데"라고 말을 줄이면서 "지금도 코트에서 뛰는 꿈을 꾸곤 한다"고 아쉬워했다.


그렇게 김훈은 끝내 부상을 떨쳐내지 못했고, 시간은 무심하게도 흘렀다. 결국, 2006~2007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그의 나의 34세에 결정한 이른 은퇴였다. 그는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창원 LG에서 유소년 농구 클럽의 총감독을 제안해서 맡게 됐다"고 설명했다.


◇"유소년 농구 지도한 지 10년, 보람·쾌감 있어"


엉겁결에 맡은 유소년 농구클럽 총감독. 프로에서 10년을 뛴 그에게 유소년을 가르치는 일이 처음부터 내켰던 건 아니었다. 김훈은 "몇 달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고, 쳐다만 봤다. 그러다 한 강사가 아프면서 어쩔 수 없이 수업에 참여하게 됐다. 그때 레이업 슛을 하지 못하던 한 학생이 10분 만에 바로 해냈다. 아이들의 실력이 향상되는 걸 지켜보고 있으니 보람과 쾌감이 생겼다"면서 유소년 농구 지도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유소년을 가르치겠다는 마음을 굳힌 김훈은 한 방송국의 해설위원 제의도 거절했다. 그는 "방송국 관계자들이 다 창원으로 내려왔었다"고 밝히면서 "가르치는데 재미를 붙이기도 했고, 맡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이들을 두고 떠나기가 그랬다"고 털어놓았다. 그렇게 그는 수원시의 제안을 받고 2009년 김훈의 농구 교실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 달리, 농구교실 운영은 초반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2009년을 강타했던 신종 플루의 여파가 농구교실에도 영향을 미친 것. 그는 "200명 정도였던 아이들이 신종 플루 때문에 60~70명 정도로 줄었다. 그때 프로구단 코치 제의가 왔다"면서 "사실 프로에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농구교실을 시작한 지 1년도 안 되는 상황에서 아이들을 배신하고 갈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약속이 더 중요했다"고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 이어 "그런데 이제는 코치 제의가 안 온다"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김훈의 지도 철학, '재미' 그리고 '즐김'


'지금 프로 구단 코치 제의가 오면 어떨 것 같냐'라는 질문에 김훈은 긴 한숨을 내쉰 뒤 "제의가 오면 고민을 진짜 많이 할 것 같다"고 어렵게 입을 뗐다. 이어 "70%는 프로에 가지 않을 것 같다. 만약에 간다고 해도 1~2년 정도 '프로는 이렇구나'라는 걸 느끼기 위해 짧게 할 수는 있겠지만, 오래 있지는 않을 것 같다"고 농구 교실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어느덧 김훈이 농구 교실을 운영한 지도 올해로 10년째를 맞았다. 프로구단 코치 제안도 뿌리치게 한 유소년 농구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는 "꼭 승리하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에게 주입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우리는 씨앗에 물을 주는 역할이다. 아이들에게 '안 들어갈 수 있어' '골이 들어갔을 때의 기쁨을 상상해봐'라고 말한다. 농구라는 종목이 재미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점이 좋은 것 같다"고 뿌듯해 했다.


앞으로의 목표와 꿈을 묻자 "저희 농구교실에서 많은 프로선수를 배출했으면 하는 게 목표이고, 꿈은 지금 체육관도 좋지만 저만의 체육관을 지어서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와서 마음껏 농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김훈은 "사실 은퇴하고 나서 여행가가 되고 싶었다. LG 유소년 총감독시절, 그 학생이 레이업 슛을 성공하지 않았다면, 지금 세계를 여행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라면서 "농구와 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다"고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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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l 스포츠서울DB, 박준범기자 beom2@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