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글·사진 | 스포츠서울 박준범 기자·윤소윤 인턴기자]새로운 곳에 뛰어들 땐 본인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정민철(47)의 프로 데뷔가 그랬다. 김영덕 감독의 부름에 올라간 마운드에서 만루홈런을 맞고 강판된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라고 낙담하던 순간, 선발 등판의 기회가 찾아왔고, 6이닝 1실점으로 눈도장을 쾅! 찍었다. '아기 독수리'의 감격스러운 첫 승의 순간이었다. '운명'이 되어버린 한화 유니폼을 입은 정민철의 야구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마운드도, 해설 부스도 아닌 서울 마포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정민철은 현역 시절 '거인 투수', '냉철한 승부가'로 불렸던 때와는 조금 달랐다. "소속 팀이 '빙그레 이글스'였는데 포커 페이스를 강조했던 팀 문화 때문에 빙그레 웃어본 적은 없다"며 유쾌한 농담을 던지던 그는 이제 '프로 방송인'에 가까웠다.


◇ 선수→해설위원→지도자…"부담감은 여전해"


현재 정민철은 'MBC 스포츠 플러스' 해설 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평생을 야구에 몸담아온 그에게도 해설위원의 자리는 마운드에서와는 또 다른 무게감을 느끼게 했다. 그는 "야구에 대한 생각은 점점 겸손해진다. 깊게 알아갈수록 무지하다는 게 많이 느껴진다"며 해설위원으로서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선수 시절과 비교했을 때도 그 무게감은 비슷하다고 전했다. 그는 "선발로 활약하던 시절에도 마찬가지다. 선수들은 그날 경기를 위해 많은 준비를 한다. 부담감도 컸다"면서 "해설위원이 화면 보고 말을 하기는 쉽지만 현장에 있는 수십 명의 스태프를 볼 때마다 선수 시절 만큼 부담된다"고 남다른 책임감을 드러냈다.


'지도자 정민철'의 다짐도 이어졌다. '2018 아시안게임'에 이어 올해 김경문 호의 투수 코치라는 중책을 맡게 된 그는 "팀에 소속됐을 시절과는 다르다. (국가대표팀에서는)무조건 결과를 내야 한다. 열심히 한다는 말은 필요 없다. 핑계 없이 결과로 보여드리고 수용해야 한다"며 의지를 드러냈다.


◇ '분유에 라면까지'…130cm의 소년, 아기 독수리가 되다


정민철은 충남중 시절 1년을 유급했다. 동기들에 비해 작은 체구때문에 경기에서 열외 되기도 했다. 예민하던 시기에 신체적 열세를 겪으면서 야구에 정이 떨어질 정도였다고. "어린 나이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분유도 퍼먹고 라면만 먹기도 하고. 온갖 노력을 해도 증량이 안됐다"고 말했다. "지금은 옆으로도 계속 성장하는 중인데(웃음) 말랐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가 야구공을 잡게 된 계기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대전 야구장에 갔다. 21번 박철순 선수가 공을 던졌는데 환호성이 들리더라"며 야구에 눈을 뜨게 됐던 순간을 회상했다. "투수가 공을 던지면 관중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걸 보고 저런 관심을 받고 싶다 생각했다(웃음). 단순한 이유지만 여운이 많이 남았다"며 야구 인생의 첫 출발점을 되돌아봤다.


우여곡절 끝에 1992년 프로 입단에 성공한 정민철은 첫해 14승을 시작으로 8년 연속 10승 이상, 평균 자책점 2.80 등 괄목할 만한 기록을 세우며 90년대를 주름잡는 투수로 활약했다. 정민철은 그런 자신을 만든 것은 본인도, 훈련도 아닌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정민철이 떠올린 사람은 바로 '빙그레 제2대 사령탑' 김영덕 감독이다.


"당시 1군 타자들을 위해 공을 던지는 지원 요원으로 출발했다. 어느날 김영덕 감독이 이름을 묻더니 내일부터 여기서 연습하라고 하셨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 사이에서 프로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 자체로도 영광스러웠던 신인 정민철에게 김 감독의 1군 제안은 그의 야구 인생에 있어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정민철의 첫 등판은 대전에서 열렸던 엘지 트윈스와의 경기였다. 만루 상황에서 마운드에 선 정민철은 2구째에 홈런을 맞았다. "홈런을 맞는 순간 '아, 2군에 갈 시간이다!'라고 생각했다(웃음). 마음을 다잡고 내려왔는데 김영덕 감독께서 제가 해태와의 2차전 경기 선발이라고 하더라"며 당시의 상황을 말했다. "이닝을 막아내지도 못했고, 전혀 개연성이 없는 상황에서 저를 2차전 선발로 지정하신 게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의문이다."


당시 해태와의 1차전 선발 투수는 에이스 한용덕이었다. 정민철은 관중석에서 그 경기를 관람했다. "선배가 그 경기에서 타자들에게 맥을 추지 못했다. '저 형도 저러는데 나는 그냥 망했구나' 싶었다(웃음). 프로 야구팀 버스도 타 봤으니 후회 없이 하자는 마음 뿐이었다."


마음을 비운 탓이었을까. 정민철은 해태와의 2차전에서 6이닝 1실점을 기록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정민철 인생 첫 승리투수의 순간이자 김영덕 감독의 선택을 보란 듯이 증명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는 "신문에 사진도 실리지 않은 기사가 났다. '깜짝 아기 독수리 정민철 첫 승'이런 식으로. 그걸 오려서 지갑에 넣었다. 그러면서 쭉쭉 나아갔던 것 같다"며 영광스러웠던 시절을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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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行->부상…연이은 악재 그리고 '영구결번 23번'


승승장구하던 정민철에게도 내리막은 있었다. 1999년 한국 시리즈 우승컵을 품에 안았지만 같은 시기에 팔꿈치 부상 등의 이유로 힘든 선수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누구의 탓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핑계다. 97년에 한 번 팔꿈치 부상으로 전반기를 통으로 쉬었다. 이를 못 닦을 정도로 아팠다"며 부상으로 인해 힘들었던 시기를 말했다.


부상과 우승의 영광, 그리고 야구 팬들의 기대를 등에 업고 정민철은 200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그러나 기대만큼 성적을 나타내지 못했다. 정민철은 "그냥 기량 미달이었다. 실력이 안 된다는 걸 나도 느꼈다. 옛날 구위가 돌아오지 않더라"고 밝혔다.


그렇게 정민철은 2002년 다시 국내 리그로 복귀했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2004년 시즌에는 1승도 거두지 못할 정도로 재기가 불투명해 보였다. 그는 "그때 은퇴를 고민했다. 소염제를 매일같이 먹을 정도로 팔의 수명이 다했었다"고 전했다. 어둠 속에 있었던 정민철을 끌고 나온 것 역시 '사람'이었다. 그해 겨울 부임한 김인식 감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감독님께서)아내가 만삭일 때 마무리 훈련을 가라고 하셨다. 못 가겠다고 했더니 '네가 애를 낳냐'고 혼내셨다"며 웃어 보였다. 여러 이유로 힘든 시기를 겪는 정민철에게 김인식 감독은 손을 내밀었다. 그는 "감독님께서 에이포 용지 5장을 주시더라. 어렸을 때부터 봤던 피칭 메카니즘 등 기본적인 것들이 담겨 있었다. 처음부터 해보라는 생각이셨던 것 같다. 그 덕에 기회를 얻고 반등할 수 있었다"며 김인식 감독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 후 정민철은 2007년 '일구상 재기선수상'을 수상하며 선수로서의 부활을 알렸다.


자신을 믿어주고 기다려준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선수 생활을 이어갔던 그는 2009년 '영구결번 23번'이라는 영예와 함께 마운드를 떠났다. 모든 선수의 꿈이자 숙원인 영구결번은 정민철에게도 남다른 의미였다. 그는 "굉장히 벅찼다. (영구 결번)자격이 명확하진 않지만 몸담았던 팀으로부터 평생 가져갈 수 있는 영광을 얻었는데, 그럴 자격이 있나 싶었다"면서 "(장)종훈 형과 (송)진우 형은 충분히 영구결번을 받을 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 기록도 찾아봤는데 선배들에 비해 크게 떨어지진 않더라"며 웃었다.


◇ 뜨거웠던 정민철의 '여름', 찬란했던 한화의 '가을'


지난 2018년은 정민철에게 남다른 한 해였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국가대표 투수 코치를 맡아 뜨거운 여름을 보냈으며, 시즌 중에는 한화 이글스의 눈부신 활약을 해설 부스에서 지켜보며 그들의 가을을 함께 했다.


아시안게임 전후의 논란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는 "잡음이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통감한다. 코칭 스태프, 기관을 비롯해서 전체적으로 팬 분들에게 납득을 시켜드리지 못했다"면서 "선수들이 '무조건 승리해야 한다' 는 단서가 붙은 대회에서, 부담감을 이겨내고 국민의 기대에 맞는 목표를 달성했다는 점에선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선수들의 위대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선수들이 태만하거나 나태해서가 아니다. 국가대표 선수들은 우리가 지도하지 않아도 자의적 해석 능력이 뛰어나다. 압도적이지 못했다는 건 준비 부족이 아니기 때문에 개선될 것"이라며 선수들에 대한 신뢰를 밝혔다.


지난 시즌 '정규리그 3위'와 '가을야구 진출'을 이뤄낸 한화 이글스의 한 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솥밥을 먹고 지낸 후배들이 주목받고, 만년 하위에 있다가 인기 팀으로 급상승하니 너무 좋더라"며 기뻐했다. 한화의 가을 야구 진출을 예상했냐는 물음에는 "저는 당장 제 앞길도 예상 못하는 사람이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한화는 준플레이오프에서 넥센에게 패하며 한국 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정민철은 "5등이 커트라인인 리그에서 막연하게 5등이 목표였던 팀이었기 때문에 단단했던 마음이 희석되지 않았나 싶다. 투수들이 1년 내내 보여줬던 응집력과 경쟁력은 충분했다. 실력으로는 부족함이 없었다"며 "훌륭한 선수진이 더 높은 레벨에서 경기를 하지 못했다는 게 아쉬웠다"고 말했다.


◇ '한화' 위에 그린 정민철의 '꿈'…"야구와 함께 늙고 싶다"


프로 첫 승, 한국 시리즈 우승 등 정민철의 야구 인생에 있어 눈부신 순간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짙게 남아있는 순간은 영광스러운 시절이 아니었다. 정민철은 "제 머릿속에 숙제로 남아있고 지워지지 않는 기억은 한화 투수코치 시절이다"라며 운을 뗐다.


"야구 인생에서 가장 굴곡이 많았던 시절이다. 살면서 다시 생각해야 할 기준점 같은 때다"라면서 "선수들의 작은 부분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고착된 시선으로 후배들한테 반복적인 견해나 조언을 주는 것도 마이너스라는 생각이 들었고, 스스로 성찰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며 지도자로서 겪었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정민철에게 한화는 야구 이상의 의미였다. "한화는 바탕 같은 존재다. 선수 시절부터 지금 해설위원까지 할 수 있게끔 만들어준 바탕이고. 그 위에 마음껏 제 야구 인생을 그렸다. 토대고 기반이다. 평생 그럴 거다"며 남다른 감회를 드러냈다.


빛났던 선수 시절부터 지도자 그리고 해설위원까지, 야구인으로서 있을 수 있는 자리에 전부 서 봤던 정민철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그는 "보직 상관없이 야구인으로 계속 남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전했다. "꼭 프로가 아니더라도 야구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저를 필요로 하는 데가 있다면 힘이 되고 싶다. 야구가 있는 곳에 정민철이 있었으면 좋겠고 그렇게 늙고 싶다"는 소박한 목표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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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스포츠서울 DB, 박준범기자 beom2@sportsseoul.com 윤소윤 인턴기자 younwy@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