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박준범기자] 하루 아침에 피는 꽃은 없다. 연습생 신분으로 프로 무대에 발을 들인 주희정(42)은 뛰어난 자기관리와 꾸준함으로 한국 농구의 한 획을 그었다. 물론 단번에 이뤄진 건 아니었다. 피나는 노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그는 "한 경기를 위해 모든 걸 쏟았다. 지금이야 웃으며 말하지만, 20년 동안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KBL 최초 1000경기 출장, 5381개의 어시스트(통산 1위), 1505개의 스틸(통산 1위)은 그렇게 끊임없는 노력 끝에 탄생했고, 곧 역사가 됐다. 20년 선수생활을 마치고 지도자 삶을 시작한 주희정.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 동안 농구와 함께한 그였지만 "알면 알수록 어렵다"고 말했다.


◇ 연습생에서 신인상 수상까지…"노력하니 운도 따랐다"


주희정은 고려대학교 2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1997년 원주 나래 블루버드의 연습생으로 입단했다. 그는 주변에서 말릴 만큼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저녁 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빨리 밥먹고 야간 개인 연습을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다들 저보고 미쳤다고 했다"고 웃었다.


그의 숱한 연습은 데뷔 시즌에 단 한 번뿐인 신인왕 수상으로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스틸상과 수비 5걸에도 이름을 올리게 만들었다. 운도 따랐다. 유력한 후보였던 이상민은 상무 소속으로 실업 무대에 데뷔했다는 점이 감안돼 신인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주희정은 "남들보다 노력도 많이 했고 운도 좋았다. 주변에서도 많이 도와줬다. 노력하면 운도 따라주는 것 같다"고 되돌아봤다.


그러면서 "내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특히, 상대 팀 감독이 나를 어떻게 막을 건지를 생각하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그런 가정 아래 경기 플랜을 짜고 시뮬레이션을 계속했던 게 도움이 됐다. 한 경기에 모든 걸 쏟았다"고 말했다.


◇ 계속된 이적→부단한 노력…농구에 눈을 뜨다


신인왕의 영광도 잠시, 그는 1997~1998시즌 후 서울삼성 썬더스로 이적한다. "그때는 사실 트레이드라는 것 자체를 몰랐다. 처음엔 펑펑 울었다"면서도 "막상 지내보니 삼성이라는 구단이 개인 연습하기에 좋은 환경이었기에 빨리 적응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1997~1998시즌 9위였던 삼성은 주희정의 활약 속에 해를 거듭할수록 성적이 좋아졌고, 2000~2001시즌에는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플레이오프 MVP도 주희정의 몫이었다. 그는 "외국인 선수도 뛰어났고, 이규섭·문경은 등 5명의 조화 그리고 식스맨의 활약도 리그 최고였기 때문에 우승을 할 수 있었다"고 공을 동료들에게 돌렸다.


이적은 계속됐다. 2005~2006시즌부터는 SBS(現 안양KGC 인삼공사)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7년간 함께한 삼성을 떠난다는 게 아쉬웠지만, 결과적으론 그에게 전화위복이 됐다. 그의 주무기인 속공은 물론, 동료를 이용한 플레이가 눈에 띄게 발전한 모습을 보인다. 2007~2008시즌에는 플레이오프 탈락팀 소속으로는 최초로 MVP 수상의 영예도 누렸다. 그는 "삼성에 있을 때는 넘치는 체력을 쏟을 때가 없어서 그냥 빠르게만 농구했다. 감독님들의 지적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완급 조절에 신경을 썼고, 보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농구에 눈을 떴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팀의 우승, MVP까지 따낸 주희정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2009년 서울SK 나이츠로 팀을 또 한 번 옮긴 그는 코트보다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더 많게 된 것. "암흑의 시간이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고, 은퇴 생각도 했다. 그런데 은퇴를 못 받아들이겠더라. 주희정이라는 선수가 이렇게 쉽게 지는 선수가 아니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한 번 더 어금니 깨물고 늦은 시간까지 개인 연습을 했다. 그렇게 후배들과 같이 파이팅도 열심히 하고, 5분을 뛰더라도 전력을 다했더니 식스맨상도 받게 됐다. 노력하는 사람들한테는 운은 물론 하늘도 도와주는 것 같다"고 겸손함을 표했다.


◇ 아쉬웠던 은퇴…"스스로에게 고맙다고 말하고파"


2015년에 또 한 번 유니폼을 바꿔 입은 주희정은 2016~2017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그는 "사실 지금도 몸을 만들면 20분 정도는 뛸 수 있을 것 같다(웃음). 그때도 더 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아쉬움이 더 컸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운동선수로 평생을 살 수 있겠나"라고 반문하면서 "그래도 가장 오래 뛰었고, 많은 추억이 있는 삼성에서 은퇴하게 돼서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구단 관계자들에게, 또 이상민 감독께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20시즌 동안 1029경기에 출전한 것도 대단하지만, 커리어를 통틀어 결장 경기가 15경기밖에 되지 않는 건 주희정이 얼마나 자기관리를 잘했는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2007~2008시즌부터 2012~2013시즌까지는 단 한 경기의 결장도 없다. 주희정은 "악바리 근성, 계속된 목표 설정도 비결이지만 웨이트 트레이닝만큼 좋은 보약이 없는 것 같다"고 롱런의 비결을 밝혔다. 이어 "고등학생 때, 정말 왜소했다. 뼈밖에 없었다. 대학생 형들과 시합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동아고등학교 선생님께서 웨이트 트레이닝의 필요성을 말씀해주셨고, 그때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을 꾸준히 했던 게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다른 선수들이 쉽게 깨지 못할 여러 기록을 갖고 있는 주희정이지만, 이상민·김승현 같은 다른 포인트가드들과 비교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해 "사실 속상하기도 했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저는 타고난 포인트 가드가 아니었다.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타고남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더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도 이렇게 주희정이라는 한 선수가 한국 농구에 한 획을 그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뿌듯해 했다.


◇ 모교에서 지도자 첫발…여전히 어려운 '농구'


그렇게 선수생활의 마침표를 찍은 주희정은 자신의 다음 목표인 지도자로의 첫발을 모교인 고려대에서 내디뎠다. 지난해 4월 코치로 부임했고, 올해 1월부터는 감독 대행을 맡았다. 지도자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만의 또렷한 '지도자상'을 이미 그려 놓은 상태였다. "좋은 지도자가 아니라, 선수들한테 꼭 필요한 지도자가 되는 게 목표다, 선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저로 인해서 한 번도 용기를 낼 수 있고 발돋움을 할 수 있게 선수들을 돕고 싶다"고 후배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주희정이 이끄는 고려대는 오는 18일 연세대학교와의 '2019 U 리그' 개막전을 앞두고 있다. 감독대행으로 맞는 첫 시즌, 그에게도 어려움이 있을 터. "정선규 코치에게 도움을 받고 의지를 많이 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어느 정도로 준비해야 하는지가 가늠이 안 된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갈까 걱정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진다.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이제 감독대행을 맡은 지 두 달 정도 됐는데 힘든 부분도 있다. 하지만 선수들이 하려고 하는 의지가 커서 굉장히 고맙게 생각한다. 그 점 때문에 힘들어도 제가 한 번 더 발을 딛고 힘을 낸다. 요즘 삶의 유일한 낙이다"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고도 주희정은 농구 관련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는 "최근에 '공부는 끝이 있고 답이 있는데 예술가와 운동선수는 끝이 없고 답이 없다'라는 말을 듣고 공감했다. 농구라는 게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농구공처럼, 알려고 하면 할수록 모르겠다"고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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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l 스포츠서울 DB, 박준범 기자 beom2@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