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김대령기자]446경기. 오승범(38)이 K리그(리그컵 포함)에서 뛴 총 경기수다. 마지막 경기에 출전한 지 어느덧 1년 반이 흘렀지만 여전히 K리그 역대 최다 출전 기록 8위에 올라있는 대기록이다.


K리그의 산증인과 같은 선수였지만 퇴장은 조용했다. 오승범의 출전 기록이 멈춘 시점은 2018년. 2017시즌을 끝으로 당시 소속팀이었던 강원과 계약이 만료돼 팀을 떠난 후 종적을 감췄다. 한동안 새 팀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후에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근황이 알려지지 않자 은퇴했다는 추측이 정설로 굳어졌다.


오승범은 1999년부터 무려 19시즌을 K리그와 함께한 선수다.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가는 팀마다 '언성(Unsung 알려지지 않은, 숨은) 히어로'로 불리며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후방에서 헌신적으로 뛰는 그의 모습은 몸담는 팀마다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여러 족적을 남긴 선수를 공식적인 은퇴 발표도 없이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오승범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얼마 전 제주국제대학교에서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인터뷰는 제주국제대의 연습 경기가 열린 수원 영흥공원에서 이뤄졌다. 오승범은 여전히 선수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탄탄한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은퇴에 관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오승범은 "제주국제대에 코치로 온 지 4~5개월 정도 됐다. 은퇴한 것 맞다"라며 담담하게 운을 뗐다.


오승범은 2017시즌 강원에서 리그 22경기에 출전했다. 전성기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건재한 기량을 과시하면서 강원의 상위 스플릿 진출에 이바지했다. 그렇기에 이 시즌이 오승범의 마지막 시즌이 될 것으로 생각한 이는 많지 않았다.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은퇴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500경기 출전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라며 아쉬움을 삼켰다.


발목을 잡은 것은 나이였다. 그는 "강원을 떠난 후 에이전트를 통해 여러 팀을 알아봤다. 나이에 부담을 느끼는 팀이 많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자연스럽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쉬는 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묻자 "육아를 했다"라며 웃었다. "아내가 축구선수 남편을 둬 고생을 많이 했다. 쉬는 동안 많이 도와주려 했다"라며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고 답했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것은 5개월 전. 천안 일화 시절 인연을 맺은 서혁수 감독의 제의를 받고 합류했다. "어렵다"라며 웃은 그는 "선수 때는 내가 잘하면 됐다. 지금은 수많은 선수의 실력부터 생활까지 모두 지켜보며 관리해야 한다"라며 코치로 첫발을 뗀 소감을 전했다.


오승범은 1999년 천안에 연습생 신분으로 합류하며 K리그 무대를 밟았다. 그러나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기 전 은퇴를 고민했다는 의외의 이야기를 내놨다. 그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만 생활했다. 그래서인지 축구를 하면서도 프로 리그나 프로 선수에 대한 개념이 명확히 잡혀있지 않았다"라며 "축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까 생각하다가 프로행을 택했다"라고 설명했다.


비록 고민 속에 시작한 프로 생활이었으나 그는 한번 시작한 것은 끝을 보는 성격이었다. 화려한 선수단에 밀려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다. 무려 3년을 인고하며 실력을 키웠다. 그는 "당시 안익수, 김학범 감독님이 코치로 함께 계셨다. 훈련이 정말 힘들었다. 2군에서 함께 훈련한 선수들은 모두 팀을 떠났다. 나만 끝까지 버텼다"라며 "경기에 나서진 못했지만 선수로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이런 성실함은 곧 보상을 받았다. 2003년 광주 상무에 입단해 주전으로 뛰면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준비하던 23세 이하(U-23) 대표팀에도 부름을 받았다. 최종 예선까지 맹활약했다. 움베르토 쿠엘류 감독의 눈에 들어 성인 대표팀 훈련에 참가하기도 했다.


정작 본선 무대는 밟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와일드카드가 변수로 작용했다. 중앙 미드필더 와일드카드로 뽑힌 선수는 김남일. 이 자리를 맡고 있던 김정우, 김두현, 오승범 중 오승범이 이 여파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아쉬울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특히 김남일이 본선을 앞두고 부상으로 조기 낙마해 쓴맛을 더했다. 오승범은 "올림픽은 응원하는 마음으로 봤다"라면서도 "본선에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탈락해 실망스러웠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쉽다. 만약 본선에 갔다면 성인 대표팀에도 갈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2005년에는 포항으로 이적했다. 2007년에는 데뷔 후 처음으로 팀의 리그 우승을 함께했다. 이듬해 고향팀인 제주로 이적해 중위권이었던 팀이 강호로 거듭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자신 역시 K리그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도약했다.


선수 생활의 전성기였다. 동시에 아쉬움도 있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그는 "계약 기간이 끝난 후인 2011년 재계약 조건을 두고 구단과 이견이 있었다. 해외 이적을 추진하다가 최종적으로 무산돼 다시 제주로 복귀하게 됐다"라며 "등록이 늦어져 ACL에 참가하지 못했다. 팀이 전반기 조별예선에서 탈락하면서 후반기 출전도 무산됐다"라며 아쉬워했다.


2015년에는 제주를 떠나 충주 험멜로 이적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오승범은 "이미 그때부터 많은 나이 때문에 새 팀을 찾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다행히 충주로부터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충주에 있던 황재원도 함께 해보자고 제안해 충주에 입단하게 됐다"라고 이야기했다.


충주에서 3골4도움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증명한 오승범은 이듬해 그의 커리어 마지막 팀이 된 강원에 입단했다. 그는 이 시간을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으로 꼽았다. "제주에서 뛸 때도 좋았지만 강원에 있을 때 워낙 팀 분위기가 좋아 기억에 남는다"라며 "최윤겸 감독님도 정말 좋은 분이었고 선수단도 화목했다. 편하고 재미있게 축구를 했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성과도 좋았다. 오승범은 주전으로 나이를 잊게 하는 활약을 펼쳤고 완벽한 신구 조화를 이룬 강원은 1부리그 승격에 성공했다.


승격 후 첫 시즌을 끝으로 오승범의 선수 경력은 막을 내렸다. 446경기를 뛰며 K리그의 역사를 함께한 '전설'의 퇴장이라기엔 너무도 조용했다. 은퇴 결심이 늦어지면서 소식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기 때문. 변변한 은퇴식은 커녕 은퇴 발표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승범은 "축구팬들은 물론 축구계에 있는 사람들도 아직도 은퇴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많다"라며 웃었다.


사실 박수를 받으며 떠날 기회도 있었다. 강원은 계약이 만료된 그에게 코치직을 제의했다. 하지만 2017시즌에도 20경기를 넘게 소화한 그는 몸 상태에 자신이 있었다.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요즘 김용대나 조원희 등 여러 선수가 은퇴식을 치르는 모습을 보면 부럽긴 하다"라며 "팬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라고 전했다.


끝으로 "일단 지금은 지도자가 됐다. 선수들의 기억에 평생 깊게 남는 지도자로 거듭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며 제2의 삶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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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ㅣ김대령기자, 스포츠서울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