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숙
박찬숙 WKBL 경기운영본부장이 스포츠서울과 인터뷰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용수기자

‘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이용수기자] 함성이 가득찬 체육관에 경기 종료를 알리는 버저가 울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역사의 한 순간을 장식한 사람, 모든 시선은 코트 위의 박찬숙에게 향했고 그의 플레이를 향한 찬사가 쏟아졌다. 40년 전의 일이다. 뜨거운 함성이 가득 찼던 농구장은 시대가 변하고 한국 농구가 쇠락하면서 변했다. 체육관을 가득 채웠던 농구팬들도 하나둘 떠났다. 영광의 시절을 누렸던 박찬숙(59)은 WKBL(여자프로농구연맹)경기운영본부장으로 한국 농구의 르네상스 재현을 위해 여전히 애쓰고 있다.

◇소통이 필요한 韓 여자 농구 “프로답게 멋있는 농구 했으면…”

박찬숙은 지난해 10월 심판부와 경기부가 통합된 경기운영본부를 운영하는 수장으로 임명됐다. 한국 여자 농구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적합한 인사였다. 그러나 부임 첫 시즌부터 순탄치는 않았다. 챔프전에서 벌어진 심판 판정 문제를 두고 의혹을 제기하는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찬숙 본부장은 “심판이 기계도 아니고 실수는 있을 수 있다. 오심이 고의로 그러는 게 아니고 열심히 하다 보면 생기는 것들이다. 나도 일부러 코트 바로 앞에서 보는데 놓칠 때가 있다. 그걸 판가름하는 게 심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심은 박찬숙 본부장을 흔드는 주요인이었다. 그는 “상호 간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 공정한 마음으로 심판을 배정하려 했지만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했다. 감독들은 심판의 섭리를 잘 알 텐데 거기에 불만을 쏟는 게 안타깝다. 불만이 있으면 얘기하고 풀면 되는데 흥분해서, 이성을 잃는 분들이 있어 속상하다”며 “미국 프로농구 NBA를 봐라. 지도자가 심판에게 항의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내 현역 때는 파울하면 손 들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질서도 많이 무너졌다. 그런 것들을 제도적으로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결국 문제를 풀기 위해선 소통이 필요하다. 현재 WKBL에서 활약하는 심판들은 20~30년의 경력을 가진 이들이다. 각 구단의 감독들이 심판의 성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흥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박찬숙 본부장은 “심판에게 항의하는 모습은 좋지 않다. 그러니까 플레이는 플레이대로 죽는다. 이런 모습에 새로 온 이병완 총재나 김용두 사무총장 역시 ‘이러니깐 채널을 돌리지’ 그러더라. 맞는 말이다. 누가 짜증내고 욕하는 걸 보겠느냐. 그럴 때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창피하다. 하나를 물고 늘어지면 안 된다. 팬 서비스를 해야 한다”고 문제점들을 꼬집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불만을 참기만 하라는 건 아니다. 박찬숙 본부장은 “서로 소통하는 자리를 마련할 것이다. 모든 게 불통하기에 생기는 문제들이다. 1박2일이든, 3박4일이든 허심탄회하게 생각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 그 자리를 통해 잘 해결했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소통해서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난 NBA 남자농구처럼 한 마디로 멋있어 보였으면 한다. 멋있는 사람은 자제도 하고 신사의 품격을 보여준다. 그런다면 멋있다며 농구팬도 늘어날 것이다.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프로답게 멋있어 보였으면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박찬숙
84 농구대잔치 점보시리즈 폐막 직후 은퇴식을 치르고 있는 박찬숙. (스포츠서울DB)

◇한국 여자농구 대들보 만든 태극마크의 무게(Ft. 미스 월드 바스켓)

박찬숙 본부장의 아쉬움이 큰 이유는 있다. 자신의 현역 시절과 비교되는 여자 농구의 위상 때문이다. 박 본부장이 현역을 뛸 당시만 해도 남자 농구보다 더 각광받으며 뜨거운 열기를 자랑했다. 지난 83년부터 시작된 농구대잔치의 열기는 박 본부장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찬숙 본부장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한국 여자 농구를 대표하는 간판으로 키워졌다. 당시 190㎝ 센터로서 차기 한국 여자 농구를 이끌 기대주였다. 그는 “처음에는 (태극마크가) 가슴 설레고 양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기분 좋더라. 하지만 10년차 언니들을 따라가려고 하루 4차례씩 운동을 해야했다. 힘들게 운동을 하다보니 매일 일기를 쓰며 울었다. 당시 일과가 팀 아니면 태릉선수촌이었다. 어머니께 집에 가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한국 농구는 높은 신장의 그를 키우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세계 무대 경험을 하게 했다. 박 본부장은 75년 최연소 국가대표로 콜롬비아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에 출전했다. 그는 “당시 비행기를 처음 탔다. 시간이 오래 걸리니 침대에 누워 가는 건지 알았다. 그런데 막상 탔더니 고속버스나 다름없었다. 당시 북중미를 경유해서 콜롬비아로 들어갔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국제무대에 데뷔한 박찬숙 본부장은 어린 나이에 쉽지 않은 것들을 경험했다. 무엇보다 그는 당시 기자단 선정으로 선발되는 ‘미스 월드 바스켓’에도 뽑혔다. 박 본부장은 “폐회식 때 우리가 한복을 입고 입장하니 인기가 많았다. 그때 갑자기 내 이름이 불렸다. ‘미스 월드 바스켓’이라더라. 너무 놀랐는데 언니들 눈치 보여서 좋아할 수도 없었다. 속으로 어린 나이에 주전으로 뛰었고 이런 상도 타니 자신감이 생겼다. 이때부터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 이를 계기로 내가 한국 여자 농구를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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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숙 WKBL 경기운영본부장이 스포츠서울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이용수기자

◇후배들에게 전하는 고언 “스타일수록 겸손해야 하는데…”

만 16세 최연소 국가대표로 세계 무대를 경험하고 돌아온 그에게 쏟아지는 국내의 관심과 찬사는 엄청났다. 박찬숙 본부장에게 모든 이목이 집중됐고 단숨에 국민 스타로 떠올랐다. 요즘으로 치면 수영의 박태환, 피겨의 김연아 못지않은 스포츠 스타로 주목받았다. 박 본부장은 “당시 학교 수위 아저씨가 하루에 라면 1박스씩 팬레터를 챙겨주셨다. 실업팀인 태평양에 가서도 똑같았다. 태릉선수촌에서도 우편함에 다 못 넣었다. 경비 아저씨가 박스에 따로 챙겨 줄 정도였다”고 당시 인기를 설명했다.

박찬숙 본부장은 뜨거운 인기에 힘입어 78년 이후 아시아 선수권 6연패를 달성했다.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고 그 인기는 농구대잔치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선수들이 운동하는 환경은 지금과 180도 달랐다. 열악했다. 박 본부장은 항상 몸 관리를 스스로 했다. 그는 “지금은 의무 트레이너나 안마사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전무했다. 다쳐도 가까운 의원을 찾아 침을 맞고 치료했다. 나는 국가대표로서 아파도, 피곤해도 안 된다는 생각에 몸 관리를 철저히 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재 WKBL 선수들은 좋아진 환경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 게 박찬숙 본부장의 생각이다. 좋은 환경에서 타고난 운동 신경으로 성장하는 스포츠 스타 2세들이 늘고 있지만 겸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잘할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 나도 선수 때 우쭐하고 건방 떨고 그랬지만 지금 와서 보면 후회한다. 잘할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본인이 잘 나가는 건 스스로 느끼는 게 아니라 주위에서 인정해야 한다”며 “요즘 잘나가는 선수들이 겸손했으면 한다”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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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숙 WKBL 경기운영본부장의 현역 시절(오른쪽). (스포츠서울DB)

◇84년 은메달 쾌거 속 박찬숙이 밝힌 비화

박찬숙 본부장이 현역으로 활약할 당시 난공불락이라고 불렸던 중공(현재 중국)의 진월방(2m16)이 버티고 있었다. 박 본부장은 중공이라는 벽을 쉽게 넘었다. 특히 84년에는 LA 올림픽에서 한국 구기 종목 최초 은메달 획득을 달성하기도 했다. 박 본부장은 “목숨 걸고 이겼다. 애와 어른이 경기하는 기분이었다. 중공과 경기를 할 때 이기면 2위 확보였고 지면 3~4위전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경기 전날 중공전을 계속 떠올리느라 잠을 못 잤지만 그날따라 몸이 되게 가벼웠고 림도 커 보였다. 그래서 내가 진월방과 정하이샤(2m4)를 농락했다. 그 당시 승리하고 코트 중앙에서 동료들과 껴안고 울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LA 올림픽 직전만 해도 박찬숙 본부장은 메달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무릎 연골 파열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박 본부장은 부상으로 은퇴와 복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당시만 해도 부상을 심하게 당하면 재활을 선수 본인이 직접해야 해 은퇴하는 게 수순이었다. 박 본부장 역시 “내가 못 뛰는데 애들에게 방해될 것 같았다. 그래서 선수촌에 입촌하지도 않았다”고 기억했다.

그의 마음을 돌린 건 조승연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다. 박 본부장은 “감독님이 찾아와서 ‘가기 힘든 올림픽을 가게 됐고 결정은 네가 하는 건데. 그래도 네가 지금까지 스타로서 여자 농구를 잘 이끌었는데. 중요한 건 마무리를 잘해야 되는 것 아니야?’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내가 오뚜기처럼 일어설 수 있었다. 내가 그동안 잘했는데 치사하게 아프다는 핑계로 마지막을 그렇게 장식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룬 것들이 지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을 가다듬고 한달간 죽기 살기로 몸 만들어 합류했다”고 설명했다.

박찬숙
40년 만에 학사모를 쓴 박찬숙 경기운영본부장. 제공 | 박찬숙 본부장

◇韓 농구 위해 ‘멈추지 않는 도전’ 실천 중인 박찬숙

개인적인 도전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월에는 1978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40년여 만에 학사모를 썼다. 그는 “도전 없이 산다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꿈을 향해 가야한다. 그러다보니 항상 바쁘다. 내 도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농구의 ‘대모’이기도 하다. 대모로서 역할을 어떡하면 잘할 수 있을까. 인정받는 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멈추지 않는 도전을 실천 중인 박 본부장은 앞으로 석사와 박사 공부도 고민 중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농구를 사랑해주는 팬들이 있기에 절대 실망시키지 않도록 자신감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려고 한다”고 각오를 다졌다.

purin@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