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근
장재근 서울시청 육상 감독이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용수기자
‘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이용수기자] 장재근, 이 이름 석자는 한국 육상 단거리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다. 또 최근까지는 33년간 깨지지 않는 기록을 세운 ‘아시아의 스프린터’로도 불렸다. 장재근(57) 서울시청 육상 감독은 약관(20세)의 나이로 아시아 무대에서 100m와 200m 메달을 거머쥐며 혜성처럼 등장해 80년대 한국 육상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한국 최초의 육상 아시안게임 메달과 2연패 그리고 유니버시아드 대회 메달 등 최초의 족적으로 한국 육상의 영웅으로 발돋움했다.

한 때는 현역 은퇴 후 방송가에서 에어로빅 붐을 타고 인기 방송인으로 활약하기도 했으나 다시 본업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한국 육상의 발전을 위해 몸담고 있다. 장재근 감독은 자신의 제자가 다시 한국 기록을 깨고 아시아무대에서 본인과 같은 성과를 냈으면 하는 바람으로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다.

◇육상 레전드 만든 ‘터닝포인트’ 부친의 한마디

장재근 감독은 알려진 바와 같이 초등학교 시절 배구를 잠깐 했으나 육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부터였다. 처음에는 중거리 선수로 시작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단거리로 종목을 바꿨다. 장 감독은 “가서 보니 내가 할 종목이 없더라. 그래서 남는 종목을 하라고 제안하신 선생님의 제안으로 시작한 게 신의 한 수가 됐다. 당시 실력이 좋지 않아 뭘 하든 꼴찌였기에 100m, 200m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떠올렸다.

막상 육상을 시작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던 장재근 감독의 고민은 깊었다. 하지만 부친의 한 마디에 인생이 바뀌었다. 장 감독은 “고1 겨울에 종목을 바꾸고 아버지께서 ‘운동선수가 뭔가는 한 번 해봐야하는 것 아니냐’고 그러셨다. 참 흔한 말인데 그게 귀에 꽂혔다. 그 뒤로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라는 말처럼 각오가 섰다”고 설명했다.

각오가 선 장재근 감독은 그 뒤로 죽기 살기로 운동했다. 고2 때 열린 전국체전 200m에서 3위로 입상하며 처음으로 성과의 맛을 봤다. 장 감독은 “좀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고3 때 전관왕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인생이 바뀌었다. 지금와서 돌아보면 그때 아버지의 말씀이 없었다면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내 인생의 키 포인트라고 말할 수 있다”라며 부친께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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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2연패를 거둔 장재근 서울시청 감독. (스포츠서울DB)

◇“운도 실력이 되더라” 육상 영웅 만든 아시안게임 2연패

육상에서 빛을 보기 시작한 장재근 감독은 20세 때인 1982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이 때만해도 아무도 장 감독을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그를 국제 무대로 선발한 대한체육회 역시 장 감독의 선전을 예상치 못했다.

“막무가내로 우당탕탕 하다보니 얻은 것이다. 100m 은메달도 정말 운 좋게 땄다. 준결승 8위로 결승에 올라가 1레인에 섰는데 3~6레인 선수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다 무너졌다. 그냥 죽기살기로 뛴 것 밖에 없다. 얼떨결에 2위를 한 것이다. 기록도 지금 보면 고등학생 기록도 안 되는 것이다. 아무도 생각 못했던 육상에서 메달을 따니 기운이 살았다.”

한국 육상 최초의 아시아 무대 메달이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종목에서 해낸 깜짝 성과였다. 200m가 주력 종목이었던 장재근 감독은 본 게임에서 역시 부담 없이 뛴 결과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장 감독은 “당시 아시아 200m 기록을 일본의 도요타가 가지고 있었다. 그 선수에게만은 기가 꺾이기 싫었다. 어차피 져도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부담 없이 뛰었다. 운도 실력이라고 그렇게 뛰다보니깐 운이 실력이 되더라. 다음 경기에 나서니 상대들이 내 기에 눌리더라. 나도 그 뒤로 연습도 많이 했다. 운동 한 만큼 성과가 나왔기에 그 시기 운동하는 게 재밌게 느껴졌다. 아시아 1등을 지키려고 동료들이 10번 뛰면 난 11번 뛰어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예상 외 성적을 거둔 장 감독은 4년 뒤 안방에서 열린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도 최고의 기량으로 정상을 수성하며 2연패를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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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근 서울시청 육상 감독이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용수기자

◇33년간 지닌 기록 깨지도록 만든 후배 위한 조언

장재근 감독은 1985년 자카르타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200m에서 20초 41로 한국 신기록을 작성했다. 당시 최고의 기량으로 몸을 끌어올렸던 장 감독은 한국 육상에 오래 기억될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기록은 지난 2018년 6월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박태건(28·강원도청)이 20초 40으로 0.01초 앞당겨 깰 때까지 33년의 세월이 걸렸다.

사실 박태건이 기록을 깰 수 있었던 데는 장재근 감독의 조언이 한 몫을 했다. 장 감독은 박태건이 기록을 달성하기 며칠 전 면담을 통해 동기부여를 심어줬다. 장 감독은 “너무 욕심 내지 말라고 그랬다. 기록은 뛰다보면 나오는 것이라고. 네가 욕심내면 안 나오는 것이 기록이라고. 다만 예를 들어 김국영과 200m를 뛰면 김국영에게만은 지지 말라. 몇초 뛰겠다는 기록의 문제가 아니라고 조언했다”고 떠올렸다.

장재근 감독이 기록에 연연하지 않았던 건 그 역시 현역 시절 같은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기 때문이었다. 장 감독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기록과 상관없이 옆 선수를 의식하고 뛰다보니 기록이 나왔던 것이다. 그 당시 지금은 돌아가신 서말구 선배를 이기려 했다. 아시아 대회에서는 그 당시 아시아 기록을 지녔던 일본 선수들에게만은 지지 말아야지라는 마음으로 뛰었다”고 설명했다.

◇육상 레전드 장재근이 말하는 일설과 고언

어느새 정년을 코앞에 둘 정도로 세월을 보낸 장재근 감독은 한국 육상의 발전을 위한 아쉬움과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비인기 종목 감독으로서 생활 체육과 상생하는 방안을 고려하며 체육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감독은 “현 정부의 체육 모토가 시민과 함께하는 것이다. 경기인을 위한 체육시설만 만드는 것이 아닌 시민을 위한 시설을 만들어 놓고 함께 사용하는 것이다. 최근 시 정책 사업으로 효창운동장을 공원화하기로 결정이 난 것으로 안다. 서울 안에 체육 인프라가 많이 떨어지는데 새로 짓기는 쉽지 않다.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게 좋은 대안이다. 예를 들어 현재 8레인의 육상 트랙이 있다면 4레인라도 살려서 보라매 공원처럼 시민들과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일설했다.

또 육상 내부적으로도 변해야 한다고 고언을 내놓기도 했다. 지난 4월 열린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2019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육상은 노메달의 아쉬운 성적을 거뒀다. 단 하나의 메달도 따내지 못한 부분은 아쉬울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장재근 감독은 “총체적 난국이다. 지금까지 누가 따든 1~2명은 금메달을 따곤 했다. 그런데 메달을 따지 못했다. 이건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예림, 김국영, 박태건 등 선수들의 이후를 준비해야 하는데 현재 한국 육상은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준비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장재근 감독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장 감독은 “당장 눈앞에 있는 대회만 보고 준비하면 제대로 준비할 수 없다. 우리가 올림픽에 나가 성적을 내기에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래서 아시안게임에 시선을 둬야 한다. 지난해 대회가 끝났으면 지금은 다음 아시안게임까지 어떻게 가야할지 계획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올림픽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다. 현실에 맞게 집중하자는 것”이라고 고언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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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로빅 강사 시절 장재근 서울시청 감독. (스포츠서울DB)

◇은퇴 후 외도, 그리고 육상으로 돌아오기까지

장재근 감독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방송인으로 활약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뒤 그는 지도자가 아닌 방송인의 삶을 선택했다. 장 감독이 에어로빅 강사를 하는 것을 두고 육상인들 사이에서는 ‘남자가 무슨 에어로빅이냐’는 볼멘소리가 가득했다. 하지만 장 감독이 현역 은퇴 뒤 육상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때는 실업팀이 없었다. 당시 SBS가 개국하면서 내게 제의가 왔다. 그땐 잠깐 돈 벌어 유학가서 공부하거나 오래 운동할 수 있는 골프를 하려 했다. 그런데 손에 돈을 쥐게 되니 생각이 바뀌게 되더라. 홈쇼핑도 초창기였고 많은 금액을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 돈도 벌고 재밌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허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가 자신있는 건 육상인데 육상을 못하니 허전했다.”

결국 장재근 감독은 지난 1998년 국가대표 육상 코치로 돌아왔다. 하지만 방송에 비해 많이 부족한 코치 월급으로 생활을 이어나가긴 힘들었다. 결국 주말에 홈쇼핑을 함께 했다. 육상계에서는 그런 장 감독의 모습을 탐탁찮게 봤고 98 방콕 아시안게임 직전 코치직을 내려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장 감독은 오해의 시선을 바꾸기 위해 3년간 육상인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장재근이 왜 그렇게 활동할 수밖에 없는지를 경기장에 나가 설명하러 다녔다. 경기가 열리면 적은 보수를 받고 심판을 하면서 육상인들과 얘기를 나눴다. 내 나름대로 설명할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던 반응도 차차 좋게 바뀌었다. 그렇게 걸린 시간이 3년이다. 밑바닥부터 하니까 육상인들도 내 사정을 이해했다. 그 덕분에 2009년 말 트랙기술위원장을 맡을 수 있었다.”

육상 선수에서 방송인, 그리고 다시 지도자로 육상으로 돌아온 장재근 감독은 후학양성에 힘쓰면서 새로운 꿈을 품고 있었다. 장 감독은 “박태건이 내 기록을 깼는데, 지금 내 제자 신민규(19·서울시청)가 그걸 또 깼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년이나 내후년을 보고 있다. 집 나간 기록을 가져오고 싶다. 또 국내 선수들이 현재 이루지 못한 아시아 대회 기록이나 입상을 해줬으면 좋겠다. 민규가 나와 같은 똑같은 금메달 땄으면 하는 바람에서 남은 지도자 인생을 올인하고 싶다”고 바람을 남겼다.

purin@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