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윤소윤기자]"제 배구인생은 롤러코스터보단 자이로드롭이었어요."


이숙자(39)의 배구 인생엔 중간이 없었다. 유소년 시절 에이스로 활약하며 기대를 한몸에 안고 프로 무대에 서게 됐지만, 6년이란 긴 시간 동안 코트를 밟았던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오랜 공백 끝에 주전자리를 꿰찬 뒤에는 온갖 부상이 그를 괴롭혔다. 몸이 성한 날이 없었기에 은퇴를 생각하던 중, 다시 올림픽이라는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의 포지션은 주전이 아닌 후보 세터. 어렵게 밟은 올림픽 무대에서 이숙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며 대한민국 여자 배구를 34년 만에 준결승 무대에 올려놓았다.


찬란했던 그 시절을 뒤로하고, 이숙자는 이제 곧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3개월 후 둘째 아이 출산을 앞둔 그는 인터뷰 내내 능글맞은 농담과 뻔뻔하지만 유쾌한 입담으로 극과 극을 오갔던 자신의 배구 인생을 털어놨다. "겸손이 아니라, 그냥 전부 다 운과 타이밍이었어요." 찬란했던 그의 배구 인생을 만들어 준 이숙자의 '운'은 어떤 '타이밍'에 찾아왔을까. '단짠단짠' 쉬운 것 하나 없던 이숙자의 그때 그 시절을 만나봤다.


◇"쟤가 배구를 한다고?" 여리여리 약골 소녀, 코트에 서다


이숙자가 배구공을 처음 잡은 건 다름 아닌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지금도 취미로 배구를 즐기는 그의 아버지는 당시 도민체전에서 만난 선배의 추천으로 딸에게 '배구'의 꿈을 심어주게 됐다. "예전엔 여자가 운동한다고 하면 안 좋게 봤었는데, 저희 아버지는 딸이나 아들을 통해 못 이룬 꿈을 이루고자 하셨어요. 오빠가 축구를 했었는데 몸이 허약해서 그만뒀거든요. 그래서 제가 하게 됐죠. 저는 사실 그때 배구가 뭔지도 몰랐어요.(웃음)"


이숙자는 그렇게 처음 코트에 서게 됐다. 아무것도 몰랐던 열두 살 이숙자가 배구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이천 시골 학교에서 평택으로 전학가고 싶어서 하겠다고 했어요. 하하. 근데 그 깡 시골에서 나름 키 크다고 해서 전학을 갔는데, 평택 서정리초등학교 체육관 문을 딱 여니까 선수들 키가 너무 큰 거예요. 그리고 다들 제가 감독님 추천으로 스카우트 돼서 전학 온 애니까 키가 클 거라고 생각했었나 봐요."


그들의 예상과 달리 당시의 이숙자는 마르고 연약한 소녀일 뿐이었다. "엄마가 저를 되게 여성스럽게 키우셨거든요. 처음 체육관에 간 날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눈 깜빡거리면서 들어갔어요. 나중에 들었는데 선배들이 '웬 조그만 애가 원피스 입고 들어와서는…. 쟤는 배구할 애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더라고요. 하하."


◇"인생의 희로애락 다 겪었죠" 6년간의 공백, 이숙자를 만들다


탄탄대로였던 유소년 시절을 거쳐 이숙자는 현대에 입단하게 됐다. 이숙자가 현대에 입단하던 시기인 1997년, 대한민국에는 IMF외환위기로 엄청난 경제대란이 찾아왔다. 이숙자가 인터뷰 내내 말했던 첫 번째 운은 이때 시작됐다. "아무도 모르게 계약을 맺었어요. 그땐 자유계약이니깐. 그러고 나서 한 달 뒤에 IMF가 터진 거예요! 저는 그 직전에 계약해서 금액적인 부분은 손해 보지 않았어요. 가족들끼리도 천운이라고 얘기를 많이 했죠."


승승장구하던 유소년 시절을 거쳐 현대와 계약할 당시만 해도 이숙자는 배구에 대한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입단한 이후 빛나기만 했던 그의 배구 인생에 암흑기가 찾아왔다. 당시 여자 배구를 휘어잡았던 강혜미, 장소연 등 내로라하는 실력의 주전 선수에게 밀려 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백업 선수의 삶을 살게 됐다. 엘리트 코스만 밟아왔던 그였기에 이에 따른 우울감은 무서운 속도로 그를 덮쳤다.


"아래를 내려와 본 적이 없었는데, 게임을 못 뛰면서 뒤에 있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알게 되고 자존감이 바닥을 쳤어요. 후보 선수 수준이 아니라 일 년에 한 경기도 못 뛸 정도였으니까…. 공도 거의 못 만지고 뒤치다꺼리만 했어요."


유소년 시절 내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선수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터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뒤에 있었으면 차라리 괜찮았을 텐데, 롤러코스터도 아니고 자이로드롭처럼 훅 떨어져서 정신을 못 차렸죠. 하하. 그렇게 6년을 버텼어요. 마지막 해에는 울면서 집도 뛰쳐나갔다니깐요?"


그렇게 6년이 흐르고 베테랑 선수들이 줄줄이 은퇴하며 이숙자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드디어 주전으로, 그것도 주장 완장을 달고 뛰게 됐는데 기쁘셨겠어요"라는 질문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저는 경기 못 뛰었던 6년이 제일 힘들었다고 생각했거든요. 일기장에도 죽고 싶다고 쓸 만큼? 근데 그 이후가 더 힘든거야. 언니들이 은퇴해서 기회가 왔는데, 6년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대로 몸이 안 움직이는 거예요."


6년의 시간 동안 이숙자는 토스는 커녕 네트에서 블로킹 자체를 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의 기대는 치솟았으나, 당시의 이숙자는 녹슬 대로 녹슨 상태였다. "저 때문에 항상 지는 것 같고, 나름 주장이고 최고참인데 자책을 많이 했죠. 힘들었어요. 정말."


그러나 이숙자는 무너지지 않았다. 2007년 GS로 이적하며 첫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사실 6년 쉬고 2~3년 반짝 이동해서 우승하고. 운이 좋았어요. 첫 FA를 누리기도 했고, 활약한 시간에 비해 얻은 건 많았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인내심을 얻고, 삶을 배웠어요."


하지만 첫 우승 이후 GS는 하락세를 겪기 시작했다. 팀뿐만 아니라 이숙자에게도 또 다시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발목 인대가 끊긴 상태에서 허리 수술까지 하게 되는 등 '부상'이라는 치명적인 위기가 닥쳤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던 내리막, 막다른 길목에서 비친 빛은 다름 아닌 '올림픽'이라는 꿈의 무대였다. 이숙자의 두 번째 타이밍이었다.


◇"저 선수는 대체 누구야?" 백업 세터, 대한민국의 영웅이 되다


이숙자의 인생에 있어 런던올림픽은 최고의 기회이자 가장 무거운 숙제였다. 2012년도에는 허리부상, 발목 부상으로 인해 몸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기에 올림픽 출전 자체를 기대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대한민국에는 '김사니'라는 최고의 세터가 자리하고 있던 시기였다. "언론에서 사니랑 라이벌 구도를 만들더라고요. 저는 경쟁 상대라고 생각 안 했어요. 사니는 잘 나가는 선수였고, 대표팀도 하고 근데 저는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였으니까(웃음)."


그랬던 이숙자에게 감독은 올림픽 출전을 제안했다. "사실 저는 올림픽 간다는 생각도 안 했는데, 감독님께서 주전은 아니지만 제가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세터는 허리가 생명인데 허리도 안 좋고, 발목 수술도 했고, 아킬레스건도 끊어지고. 말하다 보니 걸어는 다닌 건지 신기하네요. 하하. 그런 상황이었는데, 감독님께서 도와주는 역할만 해달라고 하셔서,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생각했죠."


언론에선 김사니와 이숙자, 베테랑 세터들의 실력과 커리어를 비교하며 경쟁 구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태극마크의 무게를 나란히 짊어진 두 사람이었기에, 경쟁이 아닌 위로를 건네며 서로의 짐을 나눠 가졌다. "세터의 마음은 세터가 잘 아니까요. 서로 으쌰으쌰 많이 했고 사니가 잘할 수 있도록 응원을 많이 해 줬어요. '나는 떨려서 못 해! 네가 해야 하니까 아프지마!' 하면서요 하하."


그렇게 이숙자의 든든한 응원을 등에 업은 김사니는 예선전부터 맹활약을 펼치며 팀을 8강전까지 올려놓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의 8강전, 지칠 대로 지친 김사니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첫 번째 세트에서 승리를 내준 뒤 감독은 김사니 대신 이숙자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숙자는 이 순간을 '운'이라 말했다.


"사니가 중요한 경기는 다 뛰었어요. 저는 교체였고. 제가 8강전에 뛸 수 있었던 건 사니가 예선 때 잘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운이 좋았던거죠. 그리고 나서 8강전을 해야 하는데, 사니가 컨디션이 굉장히 안 좋아서 제가 뛰게 됐는데 어쩌다 보니 동점을 만든 거예요! 동점 되자마자 저는 후다닥 다시 들어올 생각 했거든요. 할 만큼 했잖아요. 동점 만들었으니까(웃음)."


올림픽 내내 제대로 된 경기를 뛰어본 적이 없던 이숙자였으나, 그 활약은 놀라웠다. 강호 이탈리아를 제대로 흔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 그를 감독이 후보 선수로 둘 리 없었다. "저는 2세트 마치고 '사니야 화이팅! 잘 하고와!' 했는데 사니가 '아냐, 언니 나는 못해'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말했어요. '아니야 나도 못해. 나도 다리가 후들거려' 라고. 하하. 중요한 경기니까 둘 다 부담이 많이 된 거죠."


결국, 코트에 오른 것은 이숙자였다. 그는 8강 모든 세트에 출전하며 3:1 승리의 일등공신이 됐다. "8강이니까 이탈리아는 우리가 사니를 내세워서 베스트로 나갈 거라고 분석했을 텐데 제가 나온거예요. 허리 아프고 인대 나간 내가. 하하. 그게 통한 것 같아요. 저 선수는 누구지 싶었을 거예요."


◇ "입덧하며 했던 중계, 이제는 재미 붙였죠" 막내 해설위원, 베테랑이 되기까지


2014년 6월 이숙자는 선수 탈퇴를 마친 뒤 이듬해 2015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의 심경을 묻자 그는 그때로 되돌아간 듯 시원하게 웃었다. "속 시원했죠! 미련 하나도 없었어요. '난 이제 자유다. 끝났다' 생각했죠."


은퇴 후에도 배구인의 삶은 계속됐다. KBSN 의 해설위원으로 깜짝 데뷔를 알리며 팬들에게 반가움을 안겼다. 선수로서는 최고참 베테랑이었으나, 해설로 데뷔하던 당시의 이숙자는 병아리 해설위원에 불과했다. "해설하기에 제 나이가 되게 어린 편이었거든요. 그래서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저 전 경기를 임신한 상태로 중계했거든요. 운전하면서 가다가 봉지에 토하고. 힘들었지만 멋모르고 한 것 같아요."


정신없던 적응기를 거친 이숙자는 특유의 친절한 설명과 차분한 해설로 배구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으며, 해설위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는 제 해설 듣더니 피겨 해설 하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차분하고 조용하다고요 (웃음). 근데 다 이유가 있어요. 난 임신 중이었어! 태교 해야 해서 화를 내면 안 됐어요. 하하. 그래서 차분한 해설을 했던 건데, 좋게 들어주시니까 감사했죠."


2016년 리우올림픽 때는 해설 부스에서 후배들의 경기를 지켜봤다. 선수 시절 포커페이스의 달인으로 불렸던 그였지만, 후배들의 고군분투를 지켜볼 때는 눈물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 울었거든요. 해봐서 알잖아요. 하고 싶은데 안 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애들이 어떻게든 하려는 게 보이니깐…"


긴장감 가득한 경기장에 해설위원으로서 함께 해주는 이숙자 덕분에 후배 선수들 역시 부담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예전엔 해설위원을 나이 많은 감독님들이 하셔서, 선수들이 어려워하고 부담스러워했는데 제가 가니까 좀 편해 하더라고요. 올림픽 때 애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거 보고 '야!' 하고 소리 질렀는데, 애들이 '뭐야 저 언니 현지인 됐어. 얼굴이 왜 저래?' 이러면서 장난도 치더라고요."


"제일 악플 없는 해설위원이세요"라는 칭찬에 이숙자는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다들 제 욕은 없다고 하시는데, 제 욕은 다이렉트 메세지로 와요. 하하. 근데 신경 안 써요. '내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야 이 사람들아' 하면서 넘어가죠. 이제 4년차 쯤 되니까 경기에 집중하면서 즐기게 된 것 같아요. 재미도 있고. 짬이 좀 찼나 봐요. 하하."


◇ "행복하고 싶어요"…이숙자의 진짜 '꿈'


"제 목표는 그냥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남다른 선수 시절을 거친 그였기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지도자 제안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숙자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선수 시절 내내 구단과 대표팀을 위해 살았던 그였기에, 은퇴 이후에는 온전히 자신과 가족을 위한 삶을 살고자 했다. "숙소생활을 5학년 때부터 했잖아요. 외출 나오면 통금이 정해져 있고, 촉박하고. 얽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결혼한 후라서 아이도 가져야 하는데, 코치 생활을 하다 보면 구단에도, 가정에도 민폐니까."


임신 7개월 차, 5세 딸 아이의 엄마인 그에게 "딸 아이가 배구를 한다고 해도 시킬 수 있겠나"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랑 남편은 아이가 행복해하는 거 시키자는 주의지만, 저는 제가 겪은 걸 얘한테 굳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근데 운동신경은 진짜 있어요. 하도 뛰어다녀서 종아리에 알도 생겼고. '김연경 아카데미'를 보낼까 생각하고 있어요. 요즘엔 아빠한테 배구를 가르치더라고요? '아빠 이렇게 해. 자세를 낮춰! 이러면서요. 하하."


인터뷰 내내 모든 질문에 속전속결 답했던 그도 배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는 사실 우여곡절이 너무 많아서요. 1막 2막 3막 이 아니라 한 17막 정도 있는 것 같아. 하하."


모든 순간이 치열했기에 그의 모든 배구 인생은 소중했다. 6년의 공백, 부상, 찬란했던 순간, 모든 것이 지금의 이숙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승했다가 수술하고, 또 다치고, 6년 공백이 가장 힘들다 생각했는데 더 힘든 시기가 오고. 그러다 올림픽 4강도 가보고. 그냥 어떤 한순간보다는 모든 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정말."


인터뷰 막바지 "배구인 이숙자가 아닌 사람 이숙자의 최종 꿈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그는 "좋은 엄마?"라며 미소 지었다. "좋은 엄마는 사실 아니에요. 엄청 소리질러요 저. 하하. 최종 꿈…그런 걸 생각하고 살진 않는 것 같아요. 그냥 행복하고 싶어요.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지 않고. 저는 행복하지 않으면 삶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기회는 준비된 자의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자신의 인생을 운과 타이밍 덕분이라 설명했던 그였지만, 모든 것은 이숙자의 손 끝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인고의 시간이 차근차근 쌓여있었다. 어쩌면 이숙자는 자신도 모르게 기회를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타이밍이, 어떤 운이 또 우연히 그의 인생에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이숙자는 이제 그 '타이밍'을 '기회'로 만들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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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윤소윤기자 younwy@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