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용 "호나우지뉴가 내게 사인 받기까지 10분이면 충분했다"[이용수의 폴인풋볼]
  • 입력 2019-08-13 11:00
  • 수정 2019-08-1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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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희용 세계프리스타일축구연맹 총재가 스포츠서울과 인터뷰를 마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이용수기자

‘폴인풋볼’은 축구에 ‘푹’ 빠진 축구 산업 종사자들을 만나는 코너입니다. 축구에 매료돼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이용수기자]‘외계인’ 호나우지뉴가 사인받고, ‘축구 황제’ 펠레와 ‘명장’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인정한 한국 축구인이 있다. 그는 박지성, 기성용, 손흥민 등 유럽 빅리그에서 뛴 선수가 아닌 축구 공연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우희용(55) 세계프리스타일축구연맹(IFFA) 총재다. 우 총재는 프리스타일축구라는 분야가 전무할 당시 뛰어난 기술로 유럽 무대를 평정했다. 이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우 총재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높게 평가받는 안타까운 인재이기도 하다.

해외에서 큰 사랑과 인정을 받는 프리스타일러지만 우 총재는 자신이 개척한 프리스타일축구를 한국이 종주국으로서 발전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지난 2008년부터 국내 저변 확대에 힘쓰고 있다. 축구 산업과 더불어 프리스타일축구 역시 세계적인 산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 우 총재는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을 놓을 수 없다. 그는 현재 IFFA의 수장로서 첫 세계대회 개최를 준비하고 있다.

우희용

지난 2002년 본지와 기념촬영을 한 우희용 총재. 배우근기자 kenny@sportsseoul.com

◇프리스타일 영역 창조한 우희용의 탄생

우희용 총재는 프리스타일축구라는 영역을 새롭게 개척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축구부의 해체와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일찍 마감했고 이후 취업한 은행에서 창고지기로 근무하며 프리스타일 기술을 연마했다. 어려운 형편의 집안에서 1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나 집안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지만 선수생활을 접는 뜻하지 않은 상황에 일찍이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60세가 넘은 부모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학교 졸업도 포기하고 일했다. 우 총재는 가계를 홀로 책임지는 어머니의 힘을 덜기 위해 야구 방망이 회사부터 창고지기, 접시닦이, 술집 보조, 석유 배달 등의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축구 열정 만큼은 식지 않았다. 21세에 14개월 보충역으로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외환은행 본점에서 4년간 근무했다. 당시 본사 직원 급여의 절반 정도 밖에 못받는 은행 하청업체에서 일했던 그가 맡은 일은 전국 300~400개 지점에서 매일 신청해오는 양식을 쌓아둔 창고를 지키는 일이었다. 매일 박스를 포장해 차에 옮겨싣었다. 힘든 일을 하면서도 축구 기술을 연마했다. 우 총재는 “알려진 것처럼 일하는 도중 프리스타일 기술을 익힌 건 아니다. 그저 잠시 쉴 때 공을 잠깐 만지는 정도였다. 내가 그 당시 기술을 늘릴 수 있던 건 근무 시간이 규칙적이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출근 전 1~2시간 운동하고 점심시간 1시간을 아껴 훈련하고 퇴근 뒤에는 3~4시간 운동하며 프리스타일 기술을 연마할 수 있었다”며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프리스타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담담히 말했다.

은행 창고지기로 근무하면서 기술을 연마한 우 총재는 88년 서울 올림픽 축구 결승전 하프타임에 공연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듬해 기네스북 헤딩 오래하기 부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팀 선수단을 따라 유럽 땅을 밟으면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우 총재는 월드컵 축제 현장에 모인 축구팬들을 대상으로 그동안 연마한 프리스타일 기술을 선보였고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그때가 프리스타일을 세계 최초로 선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관객들의 호응을 보고 확신을 가졌고 선수단이 귀국한 뒤에도 나는 현지에 남아 공연을 했다. 1년간 공연했는데 당시에는 그야말로 목숨 걸고 사생결단을 내린 것이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유럽 생활 초기 노숙자나 다름 없던 우 총재는 거리의 아티스트로 돌아다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자리잡았다. 당시 슈투트가르트는 독일 유력 대기업이 본거지로 삼아 부유한 시민과 관광객이 많아 아티스트들이 활동하기 좋은 곳이었다. 우 총재는 “그렇다고 집이 있는 건 아니었다. 거리에서 생활하면서 1주일에 한 번씩 20명이 한 방에서 자는 숙소에서 자고 씻는 정도였다. 그렇게 1년 이상을 거리에서 생활했다. 독일 음료수 회사와 계약해서야 먹고 사는데 지장없을 정도가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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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1위 스포츠매거진 kicker 지면에 실린 우희용 총재.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미스터 우

독일 거리에서 인정받은 우희용 총재는 각 지역의 축구팀에도 초청됐고 경기 전이나 하프타임에 축구팬들에게 그가 개발한 프리스타일축구 기술을 선보일 수 있었다. 96년 미국으로 무대를 옮기기 전까지 독일 분데스리가 전역을 돌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90년 10월에는 이탈리아 월드컵 메인구장이었던 쥐세페 메아차 스타디움에서 축구 황제 펠레의 50번째 생일을 기념하며 열린 자선경기에 초청되기도 했다. 우 총재는 “93년에는 윔블던에서 우승한 테니스 스타 미하엘 스티치와 당시 스포츠 하일라이트 인기쇼였던 ZDF의 ‘스포트 임 트리텐’(Sport Im Treten)에 초대됐다. 스튜디오 안에서 스티치는 작은 테니스 라켓으로 나는 몸으로 테니스 공을 주고 받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며 “유럽 최고의 윔블던 스타와 공을 주고받으면서 명성을 쌓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회상했다.

분데스리가를 돌아다니며 프리스타일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얻은 그는 “프리스타일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나 같은 사람이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것을 알려야겠다는 꿈을 갖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그는 96년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 창설 당시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프리스타일을 알렸다. 우 총재는 “스타가 되더라도 미국에서 뜬다면 전 세계에 더 폭넓게 알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프리스타일을 더 많이 알릴 수 있을 것 같아 미국행을 선택했다”고 전했다.

미국으로 떠난 뒤 2002년 한일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그는 하와이에서 5년간 머물며 프리스타일을 알리면서 시간날 때마다 관광객이 많은 와이키키 해변가로 나가 거리 공연을 펼쳤다. 또 하와이 주립대에서 여성 축구팀 코치로도 활동하며 축구 지도자로서도 공부했다. 독일과 미국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다져놓았으나 프리스타일축구를 더 알리고 싶어 2002 한일월드컵 때 전국을 돌며 거리공연을 한 뒤 축구 종주국 영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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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축구매거진 ‘fourfurtwo’에 실린 우희용 총재에게 사인받는 호나우지뉴 지면기사.

하지만 영국으로 향한 우 총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거리에서 공연을 펼치다 영국에 도착한지 4개월여 만에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다. 모두가 아는 축구스타 호나우지뉴와 찍은 한 스포츠용품사 광고였다.

“촬영 기회라고 해서 프랑스 파리 샤를 드 골 다리 아래로 가니 TV광고 세트가 마련돼 있었다. 내가 도착하니 우뢰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광고주 측에서 프리스타일 하는 사람들을 모두 모았던 것이다. 호나우지뉴와 축구챔피언과 프리스타일챔피언의 대결 구도로 촬영했는데 10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그가 내게 사인을 받았다. 그 장면을 누군가 찍으면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

스포츠용품사의 광고가 전 세계에 방영되면서 우 총재의 프리스타일축구도 함께 알릴 수 있었다. 또 우 총재는 독일의 이동통신사와 택배회사의 광고를 2010년까지 매 월드컵마다 촬영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인정받은 그는 오스트리아의 한 음료업체에서 주최하는 프리스타일축구 대회 개최를 돕기도 했다.

◇국내 정착 10년의 세월, 조금씩 발전 중인 프리스타일축구 종주국

유럽 무대에서 프리스타일축구 산업을 만든 우희용 총재는 2008년 이후 내실을 다지기 위해 국내 리턴을 선택했다. 그는 “프리스타일축구 창시자이자 주도적인 전도사로서 종주국에 걸맞는 인프라와 대중화를 만들기 위해 IFFA를 창설했다. 그 이후 국내에 뿌리내리는데 비중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10년의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프리스타일축구가 스포츠로서 대중에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우 총재 역시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보는 게 맞다. 시간이 있었지만 많은 발전을 하지 못했다. 지금부터라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며 “세계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국내 대회를 여러 차례 열었지만 파급효과는 적었다. 세계대회를 통해 프리스타일축구를 한국이 주도할 수 있는 하나의 스포츠 산업이라는 것을 알리고 비전을 제시해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08년 IFFA 창설 이후 프리스타일축구를 창시한 1세대 우 총재부터 현재 4세대에 이르고 있다.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후학양성에도 힘썼던 우 총재 이후 ‘JK아트사커’의 전권(2010 세계대회 준우승), 김병준(2009 국내 우승), 권혁부, 김태희 등 제자들이 프리스타일축구 저변 확대에 기여했다.

세계대회를 계획 중인 IFFA는 오는 10월 12일 원주종합운동장에서 프리스타일축구 전국대회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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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미래로 이어질 프리스타일축구

우희용 총재는 프리스타일축구 창시자로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세계적인 축구스타로 성장하는데 프리스타일축구가 밑바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 총재는 “박지성, 손흥민, 이강인 등 축구 스타들은 모두 어린시절 기본기 훈련에 충실했기에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했다”며 프리스타일축구 자체가 기본기를 연마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다. 아이들이 프리스타일축구를 배우게 되면 세계적인 축구스타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프리스타일축구 종주국으로서 국내에 정착할 미래를 그리기도 했다. 우 총재는 “유럽 선진국에서 나를 데려가려고 유혹했다. 하지만 조국에서 프리스타일축구가 문화 자산으로 자리잡았으면 했다. 아직 많은 분이 모르지만 내 뜻이 잘 전달돼서 프리스타일축구가 국가문화 스포츠 자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치로 평가받았으면 한다”며 “국내에서 열리는 첫 세계대회는 종주국으로 갈 수 있는 첫 관문이다. 종주국이라는 선포의 의미가 될 수 있다. 세계대회를 열기 위해서는 많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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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in@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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