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홍철
여홍철 경희대 스포츠지도학과 교수가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용수기자 purin@sportsseoul.com

‘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이용수기자]도마의 신, 스포츠 레전드를 수식하는 단어는 많지만 한국 체조의 한 획을 그은 여홍철(48) 경희대 교수는 이 한 마디로 딱 정리된다. 현역 시절 남다른 기량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기술을 구사했던 여 교수는 한국 도마의 전설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여홍철 교수는 한국 체조에 둘도 없는 보배다. 태극마크를 달고 하계유니버시아드,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올림픽 등에서 큰 활약을 보인 여 교수의 딸 여서정(17·경기체고2) 마저 지난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기 때문이다. 부녀는 대를 이어 한국 체조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지난 2003년부터 경희대학교 체육학부 스포츠지도학과의 교수로서 대학 강단에 선 여 교수는 최근 활발한 방송 활동으로 대중에 다가가고 있다. 체조계에서도 국내외 대회에서 심판으로 활약하고 있는 여 교수를 찾아가 그의 전성기 시절 이야기와 최근 근황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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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메달을 목에 걸고 포디움에 선 여홍철. (스포츠서울DB)

◇“지금 규정이라면 96 애틀랜타 금메달 땄을 것”

무협영화 속 재주 넘는 게 신기해서 체조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초등학교 4학년에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상당히 늦은 출발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골수염 때문에 운동을 포기해야 하는 기로에 서면서 1년 반 정도의 공백기도 있었다. 하지만 통증을 참고 운동을 다시 시작한 그는 재능을 꽃피웠고 열여덟살이던 89년 태릉선수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차근차근 국가대표의 꿈을 키웠던 그는 도마로 91년(금)과 93년(은)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94년 히로시아 아시안게임(금), 브리즈번 세계선수권대회(동) 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는 대회를 거칠 때마다 성장했고 93년에는 그의 이름을 붙인 ‘여홍철1(여1·손 짚고 몸을 비틀어 뒤로 세 바퀴 도는 기술)’ 기술을 국제체조연맹(FIG)에 등재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여홍철2(여2·도마 짚고 몸을 펴 두 바퀴 반 비틀고 착지하는 기술)’도 개발했다.

세계적인 수준에 오른 여 교수였지만 유독 올림픽 금메달과는 인연이 없었다. 96 애틀란타 올림픽은 그에게 여전히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여 교수는 “많이 아쉬웠다. 몇 년이 지나서까지 떠오를 정도였다. 그 당시에는 규정 자체가 좋지 않았다. 금메달을 땄던 알렉세이 네모프가 실시했던 기술은 지금 중학생 아이들도 하는 수준이었다. 그때는 규정이 10점 만점 고정이었기에 금메달을 딸 수 있던 것이다. 지금 규정이라면 내가 네모프를 쉽게 이겼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현재 규정은 점수 제한 없이 반 바퀴 더 틀 때마다 0.4점씩 추가 점수를 받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고정된 만점이 있었기에 낮은 난도의 기술을 구사해도 실수만 없었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결선에서 ‘여2’의 높은 난도를 펼치고도 착지에 실패한 여 교수는 아쉽게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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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여홍철 교수가 기술을 선보이기 위해 도마를 짚으려 하고 있다.(스포츠서울DB)

◇‘도마의 신’ 여홍철이 지금까지 기억되는 이유

그에겐 아쉬운 기억으로 남았으나 체조 불모지나 다름 없는 한국에는 은총같은 순간이었다. 한국체조 사상 첫 올림픽 은메달이라는 값진 쾌거를 거두었기 때문. 낭중지추 도마 천재의 등장에 온국민의 관심과 격려, 응원이 쏟아졌다. 여 교수는 당시 그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지 몰랐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메달을 딴 뒤 올림픽 폐막식까지 마치고 귀국했다. 배구, 농구 등 구기 종목과 함께 공항 입국장에 들어서는데 인파가 엄청났다. 우리는 당시 구기 종목 선수단 뒤를 쫓아가면서 ‘이야, 배구와 농구는 성적 안 나와도 팬들이 저렇게 많네’라며 툴툴거리면서 입국했다. 그런데 버스를 타려는 순간 많은 소녀가 내게 몰리면서 ‘오빠부대’라는 걸 그때 처음 느꼈다. 인파가 몰렸을 때는 놀랐다. 놀라면서도 ‘왜 나한테 오지?’라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고 난 뒤 인기를 실감했다.”

스포츠 스타로 등극한 기억이었지만 여 교수는 자신이 관심을 받은 이유로 그의 ‘이야기’를 꼽았다. 96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도마 결선에서 여 교수는 기술을 실시하다 착지 실패로 네모프에게 금메달을 내줘야 했다. 여 교수는 “만약 내가 금메달을 땄더라면 이렇게까지 알아봐 주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내가 금메달을 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게 착지 실수로 은메달을 따지 않았느냐. 그런 아쉬움이 국민들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았나 싶다. 솔직히 올림픽에서 금메달 나오는 종목이 많은데 내게 주목한 이유는 심금을 울린 부분이 있었지 않을까 싶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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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부산 삼부파이낸스컵 국제체조대회 도마에서 고난도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스포츠서울DB)

◇96 애틀랜타보다 2000 시드니 올림픽이 더 아쉬운 이유

올림픽 금메달을 눈앞에서 놓친 아쉬움은 선수인 본인만 아는 감정이다. 당초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98 방콕 아시안게임을 마치고 선수 은퇴를 생각했던 여 교수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올림픽 금메달 때문에 2년 더 운동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끝내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사실 애틀랜타 올림픽보다 시드니 올림픽이 더 마음 아프다. 그 당시 난 기술 실수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점수를 보니 결선에 들어갈 수 없는 9등이었다. 원래 대륙별로 심판진이 구성됐지만 당시에는 유럽 심판이 주축을 이뤘다. 그때는 지금처럼 다른 기술로 2번 뛰는 게 아닌 1번 뛰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내가 세계랭킹 1위였는데 4위까지 모두 떨어졌다. 한 번이다 보니깐 10점 만점 안에서 점수를 내기 위해 고난도 기술을 실시한다. 그렇게 결선에 오른 선수는 얼떨결에 착지 성공한 선수 2~3명, 상위권 선수 3~4명 등이 올랐다. 내가 결승을 관중석에서 지켜봤는데 금메달을 딴 건 무명의 스페인 선수 게르바시오 데페르였다. 기술도 높은 난도가 아니라 내가 뒤로 넘어져도 1등 할 정도의 기술이었다. 2~3등 선수가 고난도를 하긴 했지만 두 선수 모두 착지를 못 하고 앞으로 굴렀는데 은, 동메달을 나눠가졌다. 그래서 더 아쉬운 거다.”

4년간 흘린 땀이 억울할 정도의 입상 선수들을 바라보며 시드니 올림픽은 막을 내렸다. 결국 이 대회 이후 결선에서 다른 기술을 2가지를 해야 되는 것으로 도마 규정이 변경됐다. 진정한 실력자들이 규정 때문에 떨어져 제대로 된 경쟁도 못 해 보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던 시드니 올림픽이 그 계기가 됐다.

뭉쳐야 찬다
스포츠예능 ‘뭉쳐야 찬다’에 출연 중인 여홍철(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이 어쩌다FC 멤버들과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제공 | JTBC

◇다른 종목에서 활동하는 레전드의 마음이란

시드니 올림픽 이후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대학 강단에 서는 꿈을 이루기 위해 밤낮없이 공부에 매진했고, 지난 2003년부터 경희대 체육학부 스포츠지도학과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최근에는 JTBC ‘뭉쳐야 찬다’라는 축구 예능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얼굴을 비치고 있기도 하다.

‘뭉쳐야 찬다’는 90년대에서 2000년대를 풍미했던 스포츠 레전드들이 모여 축구를 배우며 원 팀으로 뭉쳐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운동선수 출신이라 해도 은퇴하고 한참이 지난 40~50대 아저씨들이 새로운 운동을 배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카리스마 넘치던 스포츠 레전드들이 헛발질을 하거나 의외로 허당인 모습을 보기도 한다. 레전드들의 축구 교육을 맡은 안정환 감독은 이들의 축구 실력을 8세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좋은 결과를 못 내지만 요새 공차는 게 재밌다. 승부욕이 있어서 뛰다보면 마음대로 안 되니 나 자신에게 화날 때도 많다. 나뿐만 아니라 다 그런다. 허재 선배도 부상이 있으니까 제대로 뛰지 못한다.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지 자존심 상할 거다. 다른 종목 레전드들도 그 종목에선 최고인데 나이 먹고 몸도, 체력도 안 되니깐 답답할 것이다. 그런데 승부욕은 남아 있으니 대패하는 게 자존심 상하는 거다. 2주에 한 번씩 가서 연습하고 경기하는데 실력이 늘긴 힘들다. 그래서인지 다들 개인적으로 연습하고 오더라. 이봉주, 진종오, 이형택 등 다 따로 연습하고 오더라.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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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홍철 경희대학교 스포츠지도학과 교수가 스포츠서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용수기자 purin@sportsseoul.com

◇여서정에게 체조인 父 아닌 친구 같은 父이고픈 여홍철

여 교수는 ‘도마의 신’이자 ‘도마 공주’ 여서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선배이자 아버지로서 많은 조언을 해줄 것 같았지만 그는 오히려 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체조 얘기는 될 수 있으면 안 한다. 난 서정이가 질문할 때까지 기다린다. (기술에 관해) 답답하면 본인이 질문하게 돼 있다. 일주일간 체조 훈련하고 집에 왔는데 부모가 또 체조에 관해 물으면 본인이 쉴 곳이 없지 않나. 쉬고 싶어서 집에 온 건데. 일주일 내내 체조 얘기하면 얼마나 힘들겠나. 집은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체조 얘기는) 묻지 않는다.”

여 교수는 여서정에게 친한 친구 같은 아버지다. 오랜 시간 보이지 않는 노력을 했기에 가능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여 교수는 “어릴 때부터 아이들이 초등학교 5학년 될 때까지 자주 놀았다. 주말이면 무조건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모 대학교 아동심리학과 교수가 그러더라. 초등학교 4학년 정도 올라가면 성숙해서 거부반응이 온다더라. 어느날 갑자기 나랑 놀자고 하면 아이들은 놀지 않는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어릴 때부터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고 귀띔했다.

체조인 부모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어릴 때부터 본인의 노력으로 실력을 탄탄히 다진 여서정은 지난해 제18회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기계체조 여자 도마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부모의 재능을 물려받은 것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스스로 노력해서 일궈낸 포디움 상단의 자리였다. 내년 도쿄 올림픽에도 여서정의 활약이 기대되고 있다.

여 교수는 “열심히 잘 하고 있다. 지금처럼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본인 목표도 올림픽에서 메달 따는 것이더라. 그런데 대견한 게 있다. 오는 10월에 세계선수권대회가 있다. 이 대회를 통해 올림픽 출전 티켓을 딸 수 있다. 서정이는 여기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이건 단체로 뛸 수 있도록 맞춘 것이다. 현재 실력으로는 혼자서 도쿄에서 충분히 뛸 수 있다. 본인은 홀로 뛰기보다는 단체로 뛰기를 더 원하더라. 단체로 출전하게 되면 88올림픽 이후 32년 만의 출전이다. 그런 부분이 대견한 것”이라고 칭찬했다.

purin@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