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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이지석기자]어쿠스틱 기타를 손에 든 ‘유기농 가수’ 이미지의 루시드폴(본명 조윤석·44)이 새 앨범을 통해 새로운 변화에 나섰다. 그의 이름, 이미지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요소인 ‘디지털’적인 음악 기법을 적극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꾸준히 선보여온 ‘아날로그’ 그리고 ‘어쿠스틱’의 큰 틀에서 벗어나진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루시드폴은 포토 에세이를 겸한 정규 9집 음반을 16일 발매한다. 이번 음반에서 루시드폴은 새로운 시도 두가지를 선보였다.

일단 자신의 십년지기 반려견 ‘보현’을 음악적 파트너로 삼았다. 보현이 일으키는 모든 소리, 산책길 등 보현 주변의 소리를 채집해 가공했다. 보현은 어떤 마음일지 상상하며 만든 노래, 루시드폴이 본인의 마음을 직접 부른 노래, 보현과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서 영감을 받은 연주곡 등 13트랙이 담겼다. 루시드폴은 ‘소리’와 ‘음악’의 경계에 대한 물음을 근본적으로 던지고 있는데, 반려견이 대등한 위치에서 음악을 만드는 주체로 참여한 가요 역사상 최초의 사례다.

최근 만난 루시드폴은 “제주도 집 근처에 한 개인이 운영하는 유기견 보호소가 있다. 어렵게 운영하는데, 올해 발간된 그림책 ‘손으로 말해요’ 번역 작업을 의뢰받았을 때 번역비를 보호소에 지원하는 것이 의미있는 순환이란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에 그런 생각을 전했다가 내가 키우는 강아지 보현의 사진집을 내자는 제안을 받았다. 처음엔 망설였는데 음반과 연계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전했다.

이어 “아내와 함께 보현의 소리를 녹음했다. 멍멍 짖는 소리 뿐 아니라 문 열어달라고 두드리는 소리, 밥그릇 긁는 소리 등 여러 소리를 녹음해 신시사이저 등으로 소리를 변주하고, 합성해 새로운 소리로도 만들었다. 말이 되더라. 보현과 언젠가 헤어지겠지만 보현이 낸 소리의 DNA를 갖고 음악을 만들었을 때 그 노래 안에서 개가 영원히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지난 12일 공개한 선공개곡 ‘콜라비 콘체르토’에서 ‘콘체르토’는 협주곡이라는 의미다. 앨범 전체가 루시드폴의 10년지기 반려견 ‘보현’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구성된 만큼, 이번 선공개 곡 ‘콜라비 콘체르토’는 보현이 직접 연주하고, 넓은 범주의 의미에서 ‘작곡’까지 했다는 게 루시드폴의 설명이다.

루시드폴은 이 곡에서 편곡을 맡아, 보현이 콜라비를 씹을 때 나는 소리를 채집해서 그래뉼라 신테시스(granular synthesis: 소리의 작은 단위부터 출발해 이를 배열, 가공, 조합하여 다른 차원의 사운드를 만드는 디지털 음악합성 기법 중 하나)로 템포와 음의 높낮이를 변주해 노래로 완성시켰다. 연주자는 보현 한 명이지만, 한 명의 연주에 시간과 템포와 음의 높낮이를 변주해 보현이 무수한 보현과 협주하는 것과 같은 음악이 탄생했다.

이처럼 새 앨범에서 루시드폴은 디지털 및 아날로그 장비로 이를 조합해 다양한 느낌의 곡을 만들어냈다. 타이틀곡 ‘읽을 수 없는 책’은 인간에게 반려견은 한 권의 읽을 수 없는 책이라고 노래하는 곡이다.

루시드폴의 반려견 보현은 단순히 새 앨범에 ‘연주자’ 겸 ‘작곡가’로만 참여한 게 아니라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하고, ‘저작권자’로도 이름을 올리게 된다. 루시드폴은 “아내가 아티스트 네임 ‘보현’으로 저작권자 등록을 해 보현의 통장 계좌로 저작권료를 받을 예정이다. 그 돈으로 보현의 밥도 주고, 껌도 하겠지만 보현의 친구들에게도 보현의 이름으로 도움을 줄 예정이다. 훗날 보현의 사후에도 그 저작권료는 의미있는 곳에 기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쿠스틱 기타로 음악을 만들어온 루시드폴이 이번엔 디지털 장비와 악기, 기법들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큰 변화다. 그는 “어떻게 어쿠스틱한 울림으로 좋은 노래를 만들지가 오랫동안 음악적 관심사였다. 꽤 긴 시간 동안 기타 없는 내 음악을 상상하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에는 내가 거부하고 싶더라도 루시드폴의 음악이란 게 카테고리화돼 있더라. 안전한데 고착화 되는 것도 있었을 것”이라며 “지난해 농장에서 일하다가 손을 심하게 다쳐서 한동안 기타를 못쳤다. 공연도 취소했다. 음악적 거세를 당한 기분이었다. 계속 혼자 돌파구를 찾다 보니 손가락을 안 써도 되는 음악을 듣게 되더라. 전자음악, 실험 음악, 컴퓨터가 만드는 음악과 사운드 스케일에 관심이 생겼다”고 전했다.

이어 “앰비언트 음악을 들으며 소리와 음악의 경계에 대해 고민했다. 소리를 채집하고, 장비를 익히고, 소리를 조합하며 지냈다. 돌이켜 보면 기타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에겐 치명적 순간이지만 음악적으로 해방을 맞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루시드폴의 음악 앞엔 ‘어쿠스틱’, ‘자연’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디지털 장비 및 악기와 결합했을 때도 이 기조가 유지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 루시드폴은 “생각해보면 클래식기타는 인공적인 악기다. 기타줄은 나일론 심지어 카본파이버로도 만든다. 흔히 아날로그는 따뜻하고, 디지털은 차갑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아날로그에 왜곡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카세트테이프, LP 방식 등은 음의 왜곡이 훨씬 많다. ‘아날로그 감성’은 왜곡일 경우 많다. 디지털 악기와 장비를 쓰면서 원래의 소리를 듣게 됐다는 걸 녹음하며 느낀다. ‘디지털이냐, 아날로그냐’, ‘어쿠스틱 악기냐, 전자악기냐’는 무의미하다. 표현을 구현할 수 있는 수단이 더 늘었다는 생각은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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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안테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