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한강이 굽어보이는 아차산 중턱, 그곳에는 한국 현대사의 욕망과 낭만, 그리고 격변의 세월을 고스란히 품은 거대한 성채가 있다. 1963년 4월, ‘동양 최대의 휴양지’라는 수식어를 달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워커힐(Walkerhill), 지금의 그랜드 워커힐 서울이다.
워커힐의 탄생은 단순한 숙박 시설의 건립 그 이상이었다. 6.25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60년대 초, 주한미군들이 휴가 때마다 일본으로 건너가 달러를 쓰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박정희 정권은 ‘달러를 한국에 묶어둘’ 국가적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중앙정보부가 주도하여 단 11개월이라는 경이적인 속도로 완공된 이 호텔은,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다 순직한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개관 당시 워커힐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19만 평의 대지 위에 본관, 빌라, 호텔 등 26개 동의 건물이 들어섰는데, 당대 최고의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에 참여해 웅장한 규모 속에 예술적 조형미를 더했다. 여기에 실내 수영장, 볼링장, 테니스장 등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최첨단 레저 시설이 갖춰졌다. 이는 가난했던 대한민국이 전 세계, 특히 미국을 향해 내보인 ‘국가적 쇼케이스’였다. “우리도 이런 현대적인 시설을 지을 수 있다”는 과시이자, 근대화를 향한 강렬한 열망의 투영이었던 셈이다.
워커힐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쇼(Show)’다. 워커힐은 당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산실이었다. 1963년 개관 기념무대에는 재즈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이 올랐고, 이후 패티김, 이미자, 조용필 등 내로라하는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이곳 가야금홀 무대를 거쳐 갔다. 워커힐 쇼는 한국 공연 문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기폭제 역할을 했다.

특히 1980년대, 워커힐은 밤 문화와 대중문화가 폭발하던 시대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쇼 비즈니스계의 거물들이 기획한 무대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헤비메탈 그룹 백두산의 리더 유현상이 활동하던 시절, 워커힐 무대는 록 스피릿과 쇼 비즈니스가 절묘하게 결합된 공간이기도 했다. 미군 위문 공연의 성격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한국 대중문화의 최전선으로 변모하며 유현상과 같은 스타들이 관객을 휘어잡던 곳, 그곳이 바로 워커힐이었다. 뜨거운 조명 아래 펼쳐지던 백두산의 강렬한 사운드는 당시 젊음과 자유를 갈망하던 이들에게 잊지 못할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1973년, 선경그룹(현 SK그룹)이 워커힐을 인수하면서 호텔은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정부 주도의 시설에서 민간 기업의 체계적인 경영 아래 들어오면서 워커힐은 단순한 휴양지를 넘어 고급 호텔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특히 피자힐은 수많은 연인의 데이트 명소로 자리 잡으며, 워커힐을 대중에게 더욱 친숙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특히 1980년대, 워커힐은 밤 문화와 대중문화가 폭발하던 시대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쇼 비즈니스계의 거물들이 기획한 무대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헤비메탈 그룹 백두산의 리더 유현상이 활동하던 시절, 워커힐 무대는 록 스피릿과 쇼 비즈니스가 절묘하게 결합된 공간이기도 했다. 미군 위문 공연의 성격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한국 대중문화의 최전선으로 변모하며 유현상과 같은 스타들이 관객을 휘어잡던 곳, 그곳이 바로 워커힐이었다. 뜨거운 조명 아래 펼쳐지던 백두산의 강렬한 사운드는 당시 젊음과 자유를 갈망하던 이들에게 잊지 못할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1973년, 선경그룹(현 SK그룹)이 워커힐을 인수하면서 호텔은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정부 주도의 시설에서 민간 기업의 체계적인 경영 아래 들어오면서 워커힐은 단순한 휴양지를 넘어 고급 호텔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특히 김수근이 설계해 초기에는 ‘힐탑 바(Hilltop Bar)’로 불렸던 피자힐은 독특한 건축미와 함께 수많은 연인의 데이트 명소로 자리 잡으며, 워커힐을 대중에게 더욱 친숙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쉐라톤, 그리고 2004년 아시아 최초로 문을 연 W 호텔을 거쳐 지금의 독자 브랜드인 ‘그랜드 워커힐 서울’과 ‘비스타 워커힐 서울’로 거듭나기까지, 워커힐은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해 왔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그 공간이 가진 역사성이다. 미군을 위한 휴양지에서 출발해, 독재 정권 시절의 밀실 정치가 오가던 장소로, 때로는 당대 최고의 쇼가 펼쳐지던 문화의 용광로로, 그리고 이제는 도심 속 힐링을 제공하는 휴식처로.
오늘날 아차산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마다 우리는 워커힐을 찾는다. 화려했던 60년대의 야망과 80년대의 뜨거웠던 쇼의 열기는 역사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그랜드 워커힐 서울은 여전히 한강을 내려다보며 지난 반세기의 이야기를 묵묵히 전하고 있다. 이번 주말, 굽이치는 한강 물결을 바라보며 한국 현대사의 거울과도 같은 워커힐의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는 것은 어떨까. socool@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연재기획: 원성윤의 호텔의 역사]
①모네의 캔버스, 처칠의 아지트…‘사보이’는 어떻게 전설이 됐나
②110년의 증인, 환구단 맞은편 ‘최초의 럭셔리’ 조선호텔
③샤넬이 30년간 ‘집’이라 부른 곳…리츠 파리, 럭셔리의 역사를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