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김현덕 기자] 예능이 다시 길 위로 나갔다.

목적지는 흐릿하고, 일정표는 비어 있다. 숙소가 정해지지 않았고, 다음 끼니도 확실하지 않다. 출연자는 그때그때 결정하고, 제작진은 그 선택을 따라간다. 한동안 예능을 지배했던 촘촘한 룰과 미션, 세계관의 반대편에서 ‘무계획’이라는 오래된 문법이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최근 예능가에서 무계획 콘셉트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최근 공개된 tvN ‘꽃보다 청춘: 리미티드 에디션’은 이 흐름을 가장 잘 보여준다. 프로그램은 “오늘 어디로 갈지, 어디서 잘지, 어떻게 이동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정유미, 박서준, 최우식의 국내 방랑기를 내세운다. 제한은 많지만 낭만은 무제한이라는 문구처럼, 편안한 여행보다 불편한 변수에서 재미를 찾는다.

나영석 PD의 넷플릭스 예능 ‘이서진의 달라달라’도 비슷하다. 이서진과 함께 계획도, 대본도 없는 미국 방랑기를 선보였다. 넷플릭스 공식 소개 역시 이 프로그램을 “지도도 없이 카우보이의 도시를 누비는” 방랑기로 설명한다. 정해진 목적지보다 이동 과정과 관계의 리듬에 초점을 맞춘 구성이다.

이 흐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프로그램은 ‘풍향고2’다. 유튜브 채널 ‘뜬뜬’에서 시작된 ‘풍향고’는 무계획 여행 예능의 최근 흐름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시즌2는 ENA 편성까지 이어지며 웹예능의 틀을 넘어 TV 예능으로 확장됐다. 유재석, 이성민, 지석진, 양세찬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배경으로 앱도, 예약도 없이 움직인다. 숙소도 현장에서 찾고, 식사도 그때그때 해결한다.

여행 예능에서 가장 기본이던 사전 준비와 효율을 덜어내자, 오히려 출연자들의 성격과 관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누가 먼저 불안해하고, 누가 상황을 수습하고, 누가 투덜대는지 그 반응 자체가 장면이 됐다. ‘풍향고2’가 보여준 힘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불편한 상황을 함께 지나가는 사람들의 리듬에 있었다.

무계획 예능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시청자들이 과잉 기획된 예능 문법에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근 예능은 게임과 미션, 룰, 세계관을 촘촘하게 설계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제작진의 개입은 더 정교해졌고, 출연자는 그 안에서 목표를 수행했다. 화면은 빠르고, 자막은 친절하며, 웃음의 타이밍도 비교적 분명했다.

무계획 예능은 그 빈틈을 파고든다. 출연자를 낯선 상황에 놓고, 제작진도 모든 답을 미리 정하지 않는다. 길을 잘못 들고, 식당 문이 닫히고, 숙소를 구하지 못하고, 예상 밖의 말이 튀어나온다. 중요한 건 사건의 크기가 아니다. 출연자가 계획과 다른 상황을 만났을 때 보이는 표정과 말투, 침묵과 실수가 콘텐츠가 된다.

한 방송 관계자는 “최근 시청자들은 포맷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려 하지 않는다. 인물과 상황이 바로 보이는 예능을 편하게 받아들인다”며 “무계획 예능은 출연자의 성격이 빨리 드러난다. 제작진이 억지로 웃음을 만들지 않아도 관계와 상황에서 장면이 생긴다”고 말했다.

무계획 예능의 귀환은 예능이 과거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예능이 너무 많이 설계된 시대를 지나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제작진이 모든 웃음을 계산하기보다, 출연자가 반응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는 것. 그 빈틈을 믿는 방식이 다시 힘을 얻고 있다. khd9987@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