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논란작에 입힌 놀라운 재해석
연극계 두 거장이 증명한 ‘기둥의 무게’
오는 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공연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40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온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질문을 던진다. 법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인가, 아니면 누군가를 배제하는 또 다른 권력인가. 자비는 누구에게 허락되는 것이며, 인간은 과연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존재인가는 여전히 물음표다.
연극 ‘베니스의 상인’은 이러한 질문을 무겁게 설교하지 않는다. 선과 악의 판단은 누구의 몫이며, 누구의 책임인가.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이 정할 수 있는 ‘선’이라는 기준은 무엇인가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유쾌한 웃음과 경쾌한 리듬 속으로 관객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인 뒤 마지막 순간 묵직한 질문 하나를 가슴에 남긴다.

단 한 달의 공연을 위해 국내 대표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 연극계의 두 거장 신구와 박근형이 공연을 진두지휘한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 역은 박근형이 전 회차 단독 원 캐스트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베니스의 법과 질서를 상징하는 ‘공작’ 역은 신구가 맡았다.
베니스의 상인이자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건 ‘안토니오’ 역에는 이승주와 카이가 연기한다. 사랑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바사니오’ 역은 이상윤, 지혜와 재치로 법정의 흐름을 뒤바꾸는 ‘포셔’ 역은 최수영과 원진아가 연기한다.
사랑을 선택해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제시카’ 역 김슬기와 김아영, ‘제시카’와 함께 자유를 꿈꾸며 도망을 선택하는 ‘로렌조’ 역 최정헌, 재치 있는 입담 속에 날카로운 진실을 담아내는 ‘랜슬럿’ 역 박명훈과 조달환이 무대 완성하고 있다.

◇ 고전은 어렵다? 편견 깨버린 놀라운 변신
‘베니스의 상인’은 ‘고전은 어렵다’라는 편견을 깬 대표적인 사례다. 오경택 연출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뼈대를 유지하면서도 현대 관객이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작품을 재구성했다. 원작이 가진 철학적 깊이는 무대 언어로서 한층 친절해졌다.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가장 논쟁적인 희극을 살아있는 무대언어와 역동적인 전개를 중심으로 서사를 재구성했다. 셰익스피어 특유의 재치 있는 언어와 유희, 희극의 정교한 구조에서 법과 자비, 계약과 인간 사이의 충돌을 드러낸다.
특히 복잡한 언어 대신 리듬감 있는 대사와 명확한 인물 관계를 살렸다. 희극으로 시작해 끝내 비극적 질문에 이르는 법정극 구조이지만, 사랑과 선택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서로 다른 가치와 욕망 속에서 충돌하고, 법과 인간, 복수와 자비에 대한 아이러니 속에서 쉽게 선악을 나눌 수 없는 인간 본능을 이야기한다. 특히 법정 장면은 양측의 대립을 밀고 당기며 긴장감을 극대화하면서도, 결국 사람의 감정과 선택에 집중도를 높였다.
희극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베니스의 상인’은 설정을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사랑을 선택한 사람, 복수를 선택한 사람, 법을 선택한 사람, 그리고 자비를 선택한 사람이 한 공간에서 충돌하며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이 얼마나 허약한 기준인지를 보여준다.
단, ‘베니스의 상인’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생각할 시간을 건넨다.

◇ 법정에서 터진 전율…‘샤일록’에 숨겨진 인간의 두 얼굴
셰익스피어 특유의 언어유희 역시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호흡 속에서 어렵지 않게 전달된다. 웃음이 이어지다가도 어느 순간 법정의 긴장감으로 급격히 전환되는 흐름은 공연 내내 집중력을 유지하게 만드는 힘이다. 특히 신구와 박근형이 같은 무대에서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그 자체만으로 이번 공연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된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연기하는 박근형은 단순한 악역을 거부한다. 분노와 상처, 차별의 기억을 품은 인간으로 샤일록을 재해석하며 관객들에게 쉽게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을 만들어낸다. 법을 이용해 복수를 꿈꾸는 순간조차 그의 감정은 이해의 영역으로 스며든다. 선과 악의 경계가 흐려지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베니스의 공작’을 맡은 신구는 짧은 등장만으로도 무대를 장악한다. 그는 작품 속 법과 권위라는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신구 특유의 절제된 발성과 움직임, 깊은 존재감은 무대의 공기를 바꾸는 배우의 내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안토니오’ 역의 이승주와 카이는 서로 다른 결의 해석으로 작품의 중심을 잡는다. ‘안토니오’의 선택은 단순한 우정을 넘어 희생과 책임, 인간관계에 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친구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담보로 내놓는 그의 희생은 법정 장면으로 이어질수록 비극성을 더한다. 두 배우는 캐릭터가 가진 내면의 갈등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법정 장면의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사랑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바사니오’ 역은 이상윤이 단독 출연한다. 그 작품 속에서 선택과 사랑,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을 안정적인 연기와 섬세한 감정 표현으로 캐릭터의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포셔’ 역의 최수영과 원진아 역시 작품의 핵심이다. 지혜와 재치로 법정의 흐름을 뒤집는 포셔는 단순한 해결사가 아닌 정의와 자비 사이의 균형을 상징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제시카’ 역 김슬기와 김아영, ‘로렌조’ 최정헌은 사랑과 자유라는 또 다른 축을 담당하며 극에 따뜻한 온기를 더한다. ‘랜슬럿’ 박명훈과 조달환은 블랙코미디 특유의 유머를 살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절묘하게 환기시킨다. 예상치 못한 순간 객석과 무대를 넘나드는 연출은 관객에게 색다른 재미를 안긴다.

◇ 무너진 선과 악의 경계…인간의 민낯이 남긴 묵직한 질문
400년 전 쓰인 작품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인간이 여전히 차별과 혐오, 복수와 정의 사이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베니스의 상인’은 어느 누구도 완전한 정의의 편에 세우지 않는다. 작품 속 인물 모두 자신의 신념과 욕망 속에서 선택을 반복한다.
‘베니스의 상인’은 단순히 셰익스피어의 명작을 만나는 시간을 넘어, 오늘의 사회를 돌아보게 만든다. 고전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면서도 작품이 품은 철학적 질문을 놓치지 않는다.
신구와 박근형이라는 두 거장의 존재감, 배우들의 빈틈없는 앙상블, 오경택 연출의 감각적인 재해석이 어우러지며 ‘베니스의 상인’은 단순한 고전 재현을 넘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비추는 동시대적 작품으로 완성했다.
희극적 구조 속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질문을 더욱 선명하게 전달하는 ‘베니스의 상인’은 단 4회 공연만 남겨놓은 상태, 오는 9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다. 이달 28~29일에는 대구로 무대를 옮겨 양일간 계명아트센터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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