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흥행 신화…탄탄한 원작 바탕으로 연출·넘버·배우 ‘완벽’

죽음보다 강한 사랑…귀보다 먼저 울린 심장

10월18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 공연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드라큘라’, 뱀파이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불멸의 존재다. 영화와 발레, 연극을 넘어 뮤지컬 무대에서도 수없이 변주된 상상 속 인물이지만, 뮤지컬 ‘드라큘라’ 속 그는 단순히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400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단 한 여인을 사랑한 남자, 이루지 못한 사랑의 상처를 품은 가여운 남자다.

‘드라큘라’는 브램 스토커의 소설을 바탕으로 4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 사람을 사랑하고, 다시 만난 뒤에는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남자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탄탄한 원작의 스토리 라인과 프랭크 와일드혼 특유의 웅장한 감정 선율이 더해 작품의 늪으로 빨아들인다.

단 한 여인을 향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400년의 죽음을 초월한 ‘드라큘라’ 역은 신성록, 김준수, 전동석, 고은성이 책임진다. 드라큘라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미나’ 역에는 조정은, 박지연, 김환희가 맡는다. 드라큘라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평생을 바쳐온 집념의 사냥꾼 ‘반 헬싱’ 역은 강태을과 임정모가 팽팽한 대립각을 세운다. ‘미나’의 약혼자로 한결같은 사랑을 보내는 ‘조나단’ 역은 진태화, 임현준이 나선다. 드라큘라에 의해 흡혈귀로 변하는 ‘루시’ 역은 이예은과 이아름솔이 연기한다.

◇ 뱀파이어의 애절한 외침…공포보다 강렬한 사랑

‘드라큘라’는 그의 사랑에 굳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판타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죽음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조차 무대 위에서는 이상할 만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차라리 타임슬립처럼 시간을 오가는 이야기였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안긴다. 긴 기다림 끝에 ‘환생’이라는 운명으로 다시 시작된 사랑은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감수성을 자극한다. 작품이 12년 동안 여섯 번째 시즌까지 대극장의 대표 흥행작으로 살아남은 이유다.

브램 스토커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드라큘라 백작과 미나의 운명적인 사랑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욕망과 선택, 집착과 희생을 촘촘하게 엮는다. 지난 7월 공연예술통합전산망 기준 티켓예매액 최고액을 기록하며 작품의 흥행성까지 다시 한번 증명했다.

인간의 피(血)로 영원한 ‘젊음’을 누릴 수 있지만, 미나가 없는 삶은 드라큘라에게 의미가 없다. 노인의 모습이던 드라큘라가 그녀와 재회하기 위해 다시 젊음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은 지금껏 참아왔던 룰(Rule)을 깨뜨리는 대목이다.

‘드라큘라’에는 묘한 여운이 있다. 이야기의 결말은 분명하지만, 막이 내린 후 애잔한 감정이 혈관을 타고 올라와 온 정신을 마비시킨다. 공연장을 나와서도 쉽게 감정을 떨쳐내기 어렵다. 죽음도, 신의 저주도 막지 못한 사랑을 바라본 뒤 찾아오는 여운이 짙은 거부할 수 없는 작품이다.

결국 ‘드라큘라’는 뱀파이어 이야기가 아니라 기다림을 노래한다.

◇ 청력 깨운 명곡 ‘심장 저격’…4중 회전무대의 압도적 ‘마법’

‘드라큘라’의 힘은 음악에서도 폭발한다. 절절한 순애보를 노래하는 넘버들도 관객을 유혹하는 포인트다. 프랭크 와일드혼의 중독성 있는 드라마틱한 감성은 사회에 찌들어 마비돼있던 청력을 깨운다.

대표 넘버 ‘Loving You Keeps Me Alive’는 드라큘라의 사랑을 가장 직접적으로 관객의 심장을 저격한다. 한 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는 선율과 절절한 가사는 캐릭터의 감정을 관통한다.

‘Fresh Blood’ 역시 작품의 긴장감을 단숨에 끌어올리는 넘버다. 오직 한국 공연에서만 만날 수 있는 ‘She’는 드라큘라의 복합적인 감정을 대변한다. 자신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미나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그의 고백은 사랑과 집착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애간장을 태운다.

작품의 숨통을 끊지 않기 위한 무대 연출은 생명의 연장선처럼 느껴진다. 감정의 흐름은 단순한 장면 전환과 화려한 조명에 의존하지 않는다. 4중 회전무대를 활용해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빠르게 연결한다. 회전하는 무대 위에서 인물과 공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긴 호흡의 서사가 끊기지 않는다. 트란실바니아의 차가운 공기가 장작불에 녹아 인간이 만들어낸 온기를 전한다.

◇ ‘경력 드라큘라’의 치명적 매력…제대로 터진 ‘신입’의 강렬한 한 방

‘드라큘라’ 역은 네 명의 배우가 각기 다른 색깔로 작품을 완성해 회전 관람의 욕구를 불태운다.

오랜 시간 쌓은 내공으로 ‘드라큘라’를 지켜온 신성록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드라큘라의 위엄뿐 아니라 사랑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적인 모습까지 설득력 있게 그려내, 거대한 존재가 한 사람 앞에서만큼은 무력해지는 역설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최근 4시즌을 책임지고 있는 전동석은 특유의 폭발적인 가창력과 감정 표현으로 절절한 사랑을 극대화한다. 강렬한 에너지와 섬세한 감정선을 동시에 가져가며 ‘불멸의 존재’와 ‘사랑에 사로잡힌 남자’ 사이의 간극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초연부터 개근 중인 김준수는 말 그대로 자신만의 ‘드라큘라’를 구축했다. 날카로운 카리스마와 독보적인 음색, 극적인 순간마다 감정을 폭발시키는 무대 장악력이 캐릭터에 강한 색을 입힌다. 그의 사랑이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모두 건 절대적인 감정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전달한다.

이번 시즌 새롭게 합류한 고은성은 ‘신입 드라큘라’로서 ‘경력 드라큘라’의 흔적을 그대로 따라가기보다 자신의 장점을 앞세워 다른 결로 접근한다. 그가 가진 외로움과 미나를 향한 그리움, 설렘을 섬세하게 쌓아, 두려운 뱀파이어의 모습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흔들리는 한 남자의 모습으로 다가간다. 오랜 세월 기다려온 사람을 다시 만났다는 설렘과 또다시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차갑고 위압적인 드라큘라가 아닌 사랑 때문에 강해질 수밖에 없는 드라큘라를 완성한다.

아쉽게도 고은성은 11일 공연을 끝으로 이번 시즌 무대를 먼저 마무리한다. 다음 시즌을 기다리게 할 만큼 자신의 이름으로 새로운 드라큘라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400년을 기다린 드라큘라와 달리 ‘고큘’을 그렇게 오래 기다릴 것 같지 않은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가장 위대하고 절실한 400년의 기다림을 단 한 번의 공연으로 경험할 수 있는 ‘드라큘라’는 오는 10월 18일까지 서울 마곡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에서 공연된다.

gioia@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