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글·사진 | 춘천=원성윤 기자] 가을이 짙어지는 의암호의 물결을 따라 강원도 춘천으로 향하는 길은 늘 설렘을 동반한다. 여행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훌쩍 떠난 곳에서 지역의 고유한 식재료와 수십 년의 뚝심이 담긴 미식을 마주하는 일은 지친 일상에 깊은 위로를 준다.

최근 춘천은 단순한 주말 나들이 명소를 넘어, 새로운 미식 관광의 성지로 거듭나고 있다. 코레일관광네트웍스와 농림축산식품부, 한식진흥원이 추진하는 ‘2026 K-치킨벨트’ 사업의 핵심 지역으로 춘천이 선정되면서, 닭갈비라는 친숙하고도 대중적인 향토 음식을 지역의 식재료와 관광, 그리고 다채로운 문화 콘텐츠로 연결하는 거대한 미식 생태계가 구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코레일관광네트웍스와 춘천시가 선보이는 ‘하룻밤 한 상(賞)’이라는 이름의 체류형 미식 여행 코스는 주목할 만하다. 춘천의 닭갈비는 본래 하나의 커다란 철판을 둥글게 둘러싸고 앉아 다 함께 음식을 익혀 먹고, 마지막 볶음밥까지 정겹게 나누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계모임’ 문화의 정수다. 춘천은 이러한 공동체적 식문화를 현대적인 로컬 미식 관광으로 훌륭하게 재해석해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웃음을 나누며 관계를 이어가던 따뜻한 철판 앞의 기억이, 이제는 춘천의 풍경과 전통주, 그리고 다채로운 체험과 연결된 ‘잘 차려진 한 상’으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 풍성하고 다채로운 춘천 미식 여정의 첫 문을 우아하게 여는 것은 다름 아닌 맑고 향기로운 약주 한 잔이다. 다산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 속 ‘화전(花前) 일취(一醉)’라는 구절에서 영감을 얻은 이 술은 강원도 춘천 서면 박사마을에 위치한 농업회사법인 ‘지시울’의 대표 약주다. 꽃이 곁에 없어도 꽃 앞에서 향기를 느끼며 마시는 술이라는 서정적인 의미처럼, 지시울은 국내산 쌀과 밀 누룩, 정제수 외에는 일체의 인공 첨가물 없이 묵묵히 전통 방식을 고집한다.

모든 발효와 숙성 과정은 기계가 아닌 숨을 쉬는 전통 옹기에서 이루어지며, 무려 100일간의 발효와 두 달간의 숙성 등 150일의 긴 기다림을 거쳐야만 비로소 맑고 깊은 약주가 완성된다. 빠르고 쉬운 대량 생산의 유혹 속에서도 수작업을 고집한 결과, ‘화전일취 15’는 2024년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약주·청주 부문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수상하며 우리 술의 원형과 가치를 당당히 증명해냈다.

지시울양조 유소영 대표는 “요즘 전통주 붐이 일면서 많은 분들이 쉽고 빠르게, 맛있는 술을 대량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만 저는 이것이 저만의 틈새시장이라고 생각한다”며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저와 우리 술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방법이 바로 이 전통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묵묵히 고집하고 있다”고 단단한 철학을 밝혔다.

150일의 기다림이 빚어낸 맑은 약주가 식탁에 준비되었다면, 이제 춘천 미식의 뼈대인 다채로운 닭요리를 본격적으로 마주할 차례다. 1960년대 돼지고기를 대신해 닭고기를 양념에 재워 숯불에 구워 먹던 것에서 출발한 춘천 닭갈비는 시대와 함께 진화해 왔다. 명동닭갈비 골목과 온의동 닭갈비 거리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철판 닭갈비는 닭고기에 아삭한 양배추, 달콤한 고구마, 향긋한 깻잎 등 지역의 다양한 식재료가 어우러져 매콤달콤하고 풍성한 맛을 자랑한다.

반면 신북읍 닭갈비 거리 일대에서는 닭갈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숯불 닭갈비의 진수를 여전히 맛볼 수 있다. 간장, 고추장, 소금 양념을 발라 은은한 숯불 향을 입혀 구워내는 이 방식은 메밀로 슴슴하게 뽑아낸 춘천의 또 다른 향토 음식 ‘막국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완벽한 페어링을 이룬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 미식 벨트가 단순히 완성된 음식을 소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은행나무 농촌체험휴양마을에서 춘천의 햇고구마를 직접 수확해 닭갈비 사리의 원재료를 탐구하고 달콤한 고구마 디저트를 만들어보는 시간, 그리고 춘천 막국수 체험박물관에서 직접 메밀 반죽을 치대어 전통 틀에 눌러 면을 뽑아보는 경험은 음식의 재료가 밭에서 식탁으로 올라오는 ‘로컬푸드 밸류체인’을 관광객이 몸소 느끼게 해준다.

여기에 춘천산 식재료를 70% 이상 활용해 전통주와 환상적인 궁합의 한식 다이닝을 선보이는 다이닝 바 ‘호수’에서의 식사는 귀한 대접을 받는 듯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춘천의 미식 생태계는 과거의 전통에만 고여있지 않는다. 청년 창업가들이 춘천의 특산물을 활용해 독창적인 로컬 문화를 피워내고 있다. 지역 농산물인 강원도 감자를 활용한 수제 맥주 브루펍 ‘감자아일랜드’에서는 춘천 닭갈비를 토핑으로 아낌없이 얹은 ‘닭갈비 피자’와 바삭바삭한 ‘감자 치킨’, 그리고 닭갈비와 어울리는 수제 맥주 ‘닭갈비어’를 선보인다. 세대를 넘어 MZ세대와 글로벌 관광객들의 입맛까지 동시에 사로잡는 영리한 퓨전의 무대다.

여행의 끝자락, 국립춘천숲체원의 그린스테이 해먹에 누워 청량한 공기로 몸과 마음을 치유하거나 의암호 위를 미끄러지듯 가로지르는 삼악산 케이블카에 올라 춘천의 눈부신 윤슬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쉼’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춘천이 여행자에게 내어준 특별한 선물, ‘하룻밤 한 상(賞)’은 배를 채우는 단순한 행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사람과 사람, 지역 농산물과 청년들의 번뜩이는 창업 아이디어,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과 전통문화가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대한민국 미식 관광의 눈부신 이정표다. 옹기 속에서 솔직하고 우직하게 익어가는 지시울의 우리 술 향기처럼, 춘천 닭갈비 한 상도 켜켜이 쌓인 세월 속에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맛으로 진화하고 있다. socool@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