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김대령기자] 고교 최고의 유망주, 태극마크, 2002년 한일 월드컵 출전, 해외 진출, K리그 우승까지. 선수로서 경험해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예를 안았지만, 은퇴 후 지도자로 지내고 있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말하는 축구인이 있다.


K리그2(챌린지) 서울 이랜드의 창단 원년 유소년 팀 감독으로 합류해 지금은 성인팀 코치로 활약하고 있는 최태욱(37)을 최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만났다.



◇ 4강 신화. 하지만 아쉬움으로 남은 '프리미어리그 드림'


이천수 최태욱 박용호로 이뤄진 '부평고 3인방'은 아직도 축구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고교 축구의 전설과 같은 존재였다. 대학 진학을 택한 이천수와 달리 최태욱과 박용호는 안양 LG(現 FC서울)에 입단하며 프로 진출을 택했다. 그는 "고종수, 이동국 등 선배들이 프로로 직행해 성공 사례를 보여줬고, 반대로 잘하던 선배들이 대학에 가서 망가지는 경우도 봤다. 그러던 중 안양에서 좋은 제의를 받아서 합류하게 됐다. 집안 사정이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빨리 프로 선수가 돼 효도하고 싶다는 생각도 컸다"고 전했다.


안양에 입단한 최태욱은 데뷔 시즌 A매치 데뷔전을 치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비록 3백을 사용하던 안양에서 익숙한 포지션이 아닌 윙백으로 뛰었으나, 이마저도 그의 상승세에 장애물이 되지는 않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도 이름을 올렸다. 한국 축구의 역사를 쓴 이 대회는 최태욱에게 그 자체로 큰 명예를 안겨준 경기였다. 동시에 은퇴 후에도 잊을 수 없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 대회가 됐다.


2001년 12월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한 최태욱은 월드컵을 약 3개월 앞둔 3월에서야 그라운드를 다시 밟았다. 여파는 월드컵까지 이어졌고, 컨디션을 100% 끌어올리지 못한 그는 폴란드전 선발 명단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4강 독일전까지 역사적인 순간을 벤치에서 바라봐야 했다. 그리고 터키와 3·4위전 후반 34분 교체 투입돼 10여 분간 뛴 것을 끝으로 대회를 마감했다.


최태욱은 "월드컵 활약을 통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는 게 목표였다"라고 아쉬움을 삼킨 후 "월드컵 전까지는 선수로서 한 번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목표를 이루지 못한 순간이었다"라며 "4강은 정말 영광스러운 성취지만 아쉬움이 더 짙게 남아있다"고 털어놨다.


◇ 전북에 첫 우승 안긴 '판타스틱 4'


2004년에는 고향을 연고로 창단한 인천 유나이티드에 입단해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는 "고향에 대한 애정도 있었고, 무엇보다 공격수로 뛰기 위해 이적을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이듬해에는 시미즈 에스펄스로 이적하며 처음으로 해외 무대에 도전했다. 시즌 중반 연속골을 기록하는 등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여름에 부상을 입으면서 1년 만에 시미즈를 떠났다. 그는 "한국과 다른 일본 잔디에 적응하지 못해 무릎에 부상을 입었다"라고 설명했다.


시미즈를 떠난 후엔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며 K리그로 돌아왔다. 그러나 3백을 선호하는 파리아스 감독은 최태욱을 다시 윙백으로 기용했고,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지 못한 채 출전 기회를 잃어갔다.


"3백이 싫었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맞지 않는 옷으로 슬럼프를 겪던 최태욱이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한 곳은 전북이었다. 처음부터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2군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그는 "처음엔 최강희 감독님의 축구 색깔을 잘 못 따라갔다. 공격과 수비를 모두 100% 하길 원하셨고, 정신력과 투쟁을 강조하셨다"라며 "잘하는 것만 해왔던 내가 못하는 것도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시기였다"라고 밝혔다.


완벽하게 꽃을 피운 최태욱은 에닝요, 루이스, 이동국과 '판타스틱 4'로 불리는 공격 조합을 구축했다. 전북은 이들의 활약을 앞세워 2009시즌 창단 후 첫 우승을 안았다. 그는 "최고의 시즌이었다. 개인적으로도 K리그에서 가장 많은 공격 포인트(9골 12도움)를 올렸고, 팀에도 역사적인 우승을 안겨 영광이었다"라고 추억했다.


2010년 서울로 이적한 최태욱은 서울에서도 두 차례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이후 여러 차례 부상이 이어지며 부침을 겪고 2014년엔 울산으로 적을 옮겼지만, 시즌 개막 직후 큰 부상을 입어 갑작스럽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불의의 은퇴에 관해서는 "은퇴가 아쉽기보다는 울산에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하다. 계약 기간이 남았는데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나의 결정을 존중해줬다"라며 울산에 고마움을 전했다.


◇ "선수 시절보다 지도자로 첫발 디딘 지금이 더 행복해"


은퇴한 최태욱은 잠시 울산에 머무른 뒤 2015년 신생팀 서울 이랜드의 유소년 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쉴 틈 없이 달려온 그에게 1년 정도 쉴 수 있는 기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가벼운 질문을 던지자 "유럽과 남미에서 축구를 보며 공부를 하고 싶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쉬는게 아닌 것 같다'라고 반문했지만, "축구를 보는 게 쉬는 것"이라고 다시 강조했다.


그는 "선수로 뛰면 관중석에서 라면과 맥주, 치킨을 먹는 팬들이 보일 때가 있다. 정말 부러웠다. 은퇴 후 관중석에서 맥주를 한 잔 하며 축구를 보는 게 선수 시절 소박한 바람이었다. 독일에서 공부하던 시절 축구를 보며 핫도그에 맥주를 먹었는데 그 감동은 말로 다 하지 못할 정도였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신생팀의 유소년 팀 감독이 된 최태욱은 육성반이 창단하기 전까지 먼저 보급반을 지도했다. 보급반을 가르치며 여러 유소년 경기를 관람하던 중 아직 한국의 유소년 교육 시스템과 문화가 과거에 머물러있음을 실감했다. 그는 "실망이 컸다. 내 어린 시절과 비교해 나아진 게 없었다. 선수를 때리지만 않을 뿐,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을 오락하듯 조종했다. 아이들의 생각은 없다. 선수들은 감독이 하라는 대로만 뛸 뿐이다"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대학교도, 고등학교도, 중학교도 성적으로 간다. 그렇다 보니 경기를 풀어나가는 법이 아니라 이기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교육받고 자란 선수들은 프로팀에 가서야 빌드업과 전술을 배운다"라고 소리를 높인 뒤 "성적보다 성장을 보고 지도해야 좋은 선수가 나온다"라고 강조했다.


지도자 인생을 이야기하는 최태욱의 눈은 빛났다. '지도자 최태욱'의 꿈에 대한 물음에 "어린 시절 강압적으로 축구부에 입단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축구를 시작했다. 그렇게 축구를 하던 중 비로소 찾은 꿈이 훌륭한 지도자가 되겠다는 꿈이었다"라고 운을 떼며 "한국의 위상을 전 세계에 드높일 수 있도록 한국 축구의 철학을 바꾸고 유소년 체계를 구축하는 게 지도자 최태욱의 최종 목표"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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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ㅣ김대령기자 daeryeong@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