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림
2018 아시안게임 여자 허들 100M 금메달리스트 정혜림이 17일 광주 풍암동 숙소 근처에서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광주 | 최승섭기자 thunder@aportsseoul.com

[광주=스포츠서울 도영인기자] 꿈에 그리던 아시안게임(AG)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이번 추석에도 그는 가족들과 떨어져 트랙 위에서 구슬땀을 흘린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AG 여자 허들 100m를 통해 8년만에 한국 육상에 금메달을 안긴 정혜림(31·광주시청)은 인생의 황금기를 맞고 있다. 터질듯 터지지 않았던 잠재적 가능성만으로 애태웠던 20대를 거친 그는 30대에 접어들면서 기량이 만개해 ‘허들 여왕’으로 등극했다. 스포츠서울이 다음달 개최되는 전국체전 준비에 한창인 정혜림을 광주에서 만나 AG 비하인드 스토리와 함께 30대 육상 선수로서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좌절과 환희를 모두 맛보게 한 아시안게임

정혜림은 10대부터 유망주, 기대주라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성인 레벨에 올라와서 정작 AG, 세계선수권대회 등 메이저대회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많은 기대는 항상 부담으로 작용했다. 인천 AG 결승에서는 허들에 두 차례나 발이 걸리면서 4위에 그쳐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대회 이후 정혜림은 은퇴를 고려하기도 했다. 그는 “인천 AG에서는 나도 메달을 딸 줄 알았다. 끝나고 나에게 실망을 많이 했다. 더 이상 안되는 건가하는 생각까지 들어서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회상하며 “운동을 시작한 뒤 유일하게 그만두고 싶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모두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를 더 악물었다”고 되돌아봤다.

인천 대회 이후 절치부심한 정혜림은 2016년 광주시청으로 이적하면서 선수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았다. 최근 2~3년간 국내에서는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기량을 뽐낸 그는 또 한번의 AG에서 자신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3번째 AG에서는 그에게 불운이 아닌 행운이 찾아왔다. 최대 경쟁자로 꼽힌 중국의 우수이자오가 부상으로 인해 대회 참가가 불발된 것은 엄청난 호재였다. 우수이자오(13초08)는 시즌 최고 기록에서 정혜림(13초11)을 앞섰기 때문에 대회 전까지 여자 허들 100m의 가장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평가받았다. 정혜림은 “대회 이전부터 출전 선수 명단에 우수이자오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경기장에 가서 스타팅 라인업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확신을 하지 못했다. 뛰어난 선수이고, 내 입장에서는 가장 까다로운 상대였다. 솔직히 우수이자오가 대회에 나오지 않은 것이 너무 좋았다. 금메달에 한 발 더 다가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금메달 획득 이후 그의 삶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AG 직후에는 각종 행사와 인터뷰 요청이 많아졌지만 이젠 전국체전 준비를 위해 최대한 외부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AG 이후 알아보는 사람들이 조금 늘어나긴했다. 그는 “어디가서 육상 허들하면 ‘아, 그 선수’하고 알아보시는 정도다. 사실 평상복을 입고 다니면 잘 모르신다. 운동복 차림으로 다녀야 알아보신다”고 웃으면서 “AG 결승 레이스가 TV로 생중계가 됐다고 들었다. 방송이 나가고 나서 ‘감동적이었다’는 반응이 많았다고 하더라. 육상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자체로 너무 기뻤다. 육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부분만으로도 만족스럽다”고 뿌듯해했다.

정혜림
2018 아시안게임 여자 허들 100M 금메달리스트 정혜림이 17일 광주 풍암동 숙소 근처에서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광주 | 최승섭기자 thunder@aportsseoul.com

◇서른, 허들에 새로운 눈을 뜨다

일반적으로 육상 단거리 주자의 최전성기는 20대 중후반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정혜림은 고정관념을 깼다. 그는 한국 나이로 30세가 되던 2016년 13초04로 한국 2위 기록이자 개인 최고 기록을 달성한 이후 2년간 꾸준하게 13초1대 기록을 내면서 여자 허들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그리고 지난해 아시아선수권대회과 올해 AG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아시아 대륙을 평정했다.

육상 전문가들은 정혜림의 경우 30대에 접어든 이후 오히려 더 안정적인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고 평가한다. 정혜림은 “근력에서는 20대 중후반이 최고일 때다. 하지만 레이스가 꼭 그런 부분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허들의 경우는 다르다”고 강조하면서 “(이)연경 언니도 서른이 넘어서 한국 기록을 경신했다. 30대에도 좋은 기록이 많이 나온다. 허들이 기술 종목이라 그런지 나이가 먹으면서 단련되는 부분이 있다. 어릴 때보다 더 완성이 되고 노하우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대부분의 운동 선수들은 30대에 접어든 뒤 선수로서 황혼기를 맞는다. 정혜림도 2020도쿄올림픽 이후 허들을 계속해서 넘을지 아직은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20년 넘는 선수 생활 가운데 지금 이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정혜림은 “30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모두 다를 것이다. 난 미완성이던 부분들이 완성이 되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컨트롤하는 부분과 몸관리 등에서 오히려 더 좋은 시기라고 본다”고 말했다.

정혜림
2018 아시안게임 여자 허들 100M 금메달리스트 정혜림이 17일 광주 풍암동 숙소 근처에서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광주 | 최승섭기자 thunder@aportsseoul.com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 한국 기록

정혜림은 올해를 마지막으로 소속팀과의 계약이 만료된다. 그로 인해 현역 생활을 지속할지에 대한 궁금증도 커졌다. 그는 계약이 마무리되기 전에 일찌감치 2년 더 팀과 함께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혜림은 “아직 은퇴할 나이는 아니다. 2020도쿄올림픽까지는 현역 생활을 이어간다.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남은 목표는 단 한 가지다.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우리나라 최고 기록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목표는 한국 기록을 깨는 것이다”라고 힘줘 말했다.

최근 정혜림의 페이스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이번 AG에서 금메달은 물론 2010년 이연경이 세운 13초00의 한국 기록까지 갈아치울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그는 예선에서 13초17로 전체 1위로 결승에 올랐고 결승 레이스에서는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기록은 13초20에 그쳤다. 개인 최고 기록(13초04)에도 미치지 못한 레이스였다. 정혜림은 “육상, 특히 허들은 정말 변수가 많은 종목이다. 중요한 대회에서는 2~3등하는 선수들도 충분히 우승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잠재적인 불안감들이 레이스에 영향을 줬기 때문에 좋은 기록이 나오지 못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정혜림은 한국 기록 경신에 자신감이 남다르다. 12초대 기록을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단점을 극복한다면 기록 단축은 쉽게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는 “지금 한국 기록이 사실 굉장히 쉬운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다들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을 하시는데 나는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에 기록 경신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면서 “지도자들도 나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정말 넘을 수 없는 기록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더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 충분히 12초대 기록을 달성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dokun@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