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화성=황혜정기자]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가.”
한 유명 축구 선수가 한 말이다. 롯데 자이언츠를 2007년부터 응원했던 평범한 팬이 있다. 그런데 응원하는 팀이 너무 못해서 화도 나고 답답했다. 그래서 직접 뛰었다. 그냥 뛰는 게 아니라, 태극마크를 달고 뛴다.
롯데를 응원하던 1987년생(만 36세) 평범한 팬 신누리 씨는 그렇게 야구를 시작했고, 어느새 국가대표 7년차, 2023년도 여자야구 국가대표 최선참이 됐다.
“그 당시 롯데가 야구하는 걸 보면서 ‘진짜 못한다. 내가 하면 더 잘하겠다’ 싶었어요.” 호탕하게 웃은 누리 씨. “그래서 친구랑 근처에 있는 여자 사회인 야구팀에 들어가게 된 거죠. 그게 2013년 쯤이에요.” 누리 씨가 배트를 잡게 된 계기는 이렇게 평범하면서도 특별했다.
그렇게 야구를 시작해 5년차 야구인으로 자리잡던 2017년 여자야구 국가대표팀에 처음 발탁됐다. 그 뒤로 누리 씨는 7년간 국가대표팀 외야수 자리에 빠지지 않고 단골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 답답하던 때에 대해 “(저기 계신)양상문 감독님 시절은 아니죠?”라며 짓궂게 묻자 누리 씨는 황급히 “아닙니다. 제리 로이스터 (前롯데)감독님 시절 전부터”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 장면을 본 대표팀 양상문 감독이 “오늘(2일) 같이 (배트)쳐가지고 어떻게 경기는 뛰나?”라며 농을 던지니 누리 씨는 “감독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곧! 보여 드리겠습니다!”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양 감독은 껄껄 웃으며 “(신)누리가 원래 방망이 가장 잘 쳤다. 그런데 요즘 슬럼프인지 잘 안 맞더라”고 했다.
직접 뛰어보니 야구라는 스포츠는 어땠을까. 누리 씨는 “답답해서 직접 뛰어보니 선수들의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하게 되었어요. 야구는 생각보다 쉽고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더라구요”라고 했다.
누리 씨는 “야구는 굉장히 생각할 게 많아요. TV에서 볼 땐 다른 스포츠에 비해 움직임이 덜 하고, 그저 던지고 받고 치는 단순한 운동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직접해보니 공격할 때는 공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수 싸움도 해야하고, 수비할 때는 다양한 변수를 생각하면서 대비를 해야하더라구요. 재밌고 어려운 것 같아요.” 누리 씨의 눈이 반짝였다.
누리 씨에게 야구는 ‘제2의 인생, 그 시작’이다. “27살부터 야구를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야구를 하면서 내성적인 성격도 외향적으로 바뀌었어요. 주변사람들 모두 야구하는 사람들이고 지금은 야구를 빼곤 저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야구가 ‘제2의 인생’이라면, 태극마크는 ‘도전’이다. 누리 씨는 “개인적으로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 매년 도전을 하고 있고, 대한민국 선수로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도전하고 있습니다”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누리 씨는 그 도전을 위해 매주 주말마다 온종일 화성에 있는 한 야구장에서 대표팀 동생들과 열심히 땀 흘리고 있다.
누리 씨는 대표팀에서 가장 맏언니지만, 소위 말하는 ‘꼰대’스럽지 않다. 자신과 20살 차이가 나는 가장 어린 후배들과도 격없이 지낸다. 특히 대표팀 막내인 내야수 최드레(16)와 시종일관 장난을 치며 분위기를 띄운다.
최드레가 좋은 타구를 날리며 대표팀 양상문 감독의 칭찬을 받자, 누리 씨는 “드레야, 저거 언니가 다 잡을 수 있어~”라며 최드레가 귀여운 듯 계속 놀려댔다.
누리 씨의 남다른 배려가 숨어있다. “대표팀은 단시간에 모여 좋은 성적을 내야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20명 선수들이 빨리 뭉쳐야 해요. 제가 처음 대표팀에 갔을 때, 아는 사람이 없어서 낯을 가리고 빨리 팀에 녹아들지 못했어요. 주눅도 많이 들었죠. 그러다보니 시합할 때도 눈치를 보게되고 제 실력만큼 못하게 되더라고요.”
다 계획이 있는 누리 씨다. “제가 어릴 때 그런 경험이 있어서 처음 들어오는 친구들이나 어린 친구들에게는 먼저 다가가 어색함을 깨려고 하는 편이에요. 자연스럽게 대표팀에 녹아들게 만들어야 본인 실력이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격 없이 지내는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장난치고 노는 걸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야구의 어려움도 느끼고, 재미도 느끼고, 환멸도 느끼고, 사랑도 느끼고. 그 사이에 국가대표도 됐다. 그렇지만 누리 씨는 여전히 롯데 자이언츠의 열혈팬이다. 롯데가 2023시즌 개막전에서 두산 베어스에 연장 끝내기 패배를 당한 것도 봤다는 누리 씨는 “고통받고 있죠. 아주 그냥 어제도 고통 받았어요~”라면서 롯데에 대한 ‘애증’을 강하게 보였다.
누리 씨는 이제 5월 말 열리는 2023년도 여자야구 아시안컵(BFA)에 출전한다. 코로나19펜데믹(전세계대유행)으로 국제대회가 몇 년간 열리지 않아 대표팀엔 누리 씨를 비롯해 단 몇 명만이 유경험자다.
그러나 누리 씨는 걱정이 없다. “어린 선수들이 초등학생 때부터 리틀야구단에서 체계적으로 야구를 배워와 기본기가 정말 잘 돼 있어요. 대표팀이 갈수록 연령은 낮아지는데, 수준은 높아지고 있어요. 이번에 좋은 성과 있을 것 같아요.” 누리 씨가 자신있게 말했다.
양상문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여자야구 국가대표팀은 오는 5월 26일 홍콩에서 열리는 아시안컵(BFA)에 출전해 첫 경기를 치른다. 아시아 12개국이 참가하며 4위 안에 들면 세계대회 출전권을 따낼 수 있다. 누리 씨를 포함해 대표팀 20명이 똘똘 뭉쳐 태극기를 달고 그라운드에서 뛰는 날은, 누리 씨의 야구 도전사(史)에 새로운 페이지가 쓰여지는 날이다. et16@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