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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도 선착장과 신기리 망호마을을 잇는 716m 길이의 인도교 ‘망호 출렁다리’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강진=글·사진 스포츠서울 황철훈기자] 지난주, 난데없이 하늘에선 하얀 눈이 펑펑 쏟아졌다. 꽃샘추위와 함께 찾아온 춘설(春雪)은 마치 마지막 이별을 앞두고 아쉬워하는 연인들의 마지막 몸부림처럼 애틋하고 처연했다. 올겨울은 유난히도 길고 추웠다. 그래서인지 겨울을 보내는 아쉬움보다는 봄을 맞는 설렘이 크다. “고마해라, 올 겨울은 춥고 길었다 아이가~” 영화 ‘친구’의 명대사를 패러디해 떠나는 겨울을 위로한다.어느새 밀물처럼 불어난 봄기운에 맘 설레는 요즘.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요로운 축복의 땅 ‘전남 강진’으로 봄맞이 여행을 떠났다. 세계인이 탐내는 고려청자의 고장이자 다산 정약용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 바로 강진이다.
◇강진 ‘A’로의 초대

한반도 남서쪽 끄트머리 강진은 서쪽 해남, 동쪽 장흥과 면했고, 북쪽은 월출산을 사이에 두고 영암과 마주하고 있다. 국사봉에서 발원한 탐진강은 장흥평야와 강진평야를 살찌우고 강진만으로 스며든다. 지형 또한 독특하다.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좁고 긴 강진만을 품은 강진은 형상이 마치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하반신 모양으로 영어 알파벳 A를 닮았다. 강진만 사이에 있는 섬 ‘가우도’와 이를 잇는 두 개의 출렁다리가 완벽하게 A를 구현한다. 여기에 강진군은 최고의 관광지란 뜻으로 ‘ACE’와 국내 관광의 모든 것이란 의미로 ‘ALL’ 등의 의미를 담아 알파벳 A를 이용한 문자마케팅, 일명 ‘A로의 초대’를 야심차게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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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3대정원으로 불리는 백운동 별서정원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은밀하고 신비롭게 ‘백운동 별서정원’

백운동(白雲洞)은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란 뜻으로 그 이름만큼이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정원이다.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동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으로 꼽힌다. 조선 중기 처사 이담로(1627~1701)가 계곡을 따라 조성한 정원과 별장으로 세속을 떠나 자연을 벗하며 살던 조선 선비들의 은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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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차장에서 백운동 정원으로 향하는 길. 내리막 흙길이 이어진다.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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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다원. 올겨울 냉해를 입은 탓에 온통 갈색이다.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백운동 정원으로 향하는 길. 내리막 흙길이 이어진다. 따스한 봄 햇살과 귓불을 스치는 봄바람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청아한 계곡의 물소리가 함께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면 번민을 떨치고 피안의 극락정토에 안기듯 빨간 동백숲이 자리했다. 뚝뚝 떨어진 동백은 땅을 붉게 물들이며 바위와 계곡물 위에도 피어난다. 다산이 단풍이 비친 계곡이 마치 붉은 옥처럼 아름답다 하여 홍옥폭이라 이름 지은 계곡엔 단풍 대신 붉은 동백이 그 아름다움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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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별서정원 ‘동백숲길’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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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한가운데 자리한 유상곡수(流觴曲水)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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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과 옥판봉을 한눈에 바라다볼 수 있는 정자 ‘정선대’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별서의 마당 한가운데는 유상곡수(流觴曲水)가 굽이친다. 유상곡수는 포석정처럼 술잔을 띄워 보낼 수 있게 인공적으로 조성한 물길로 민간정원으로는 이곳이 유일하다. 유상곡수 위쪽으로는 모란을 심은 화단인 모란체와 3칸 짜리 초가와 별서의 본채가 자리했다. 아래쪽 담장 밖 언덕위에는 월출산과 옥판봉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정자 정선대가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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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동백숲길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다산이 초의선사 등과 월출산 산행을 마치고 이곳을 들렀는데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제자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자신은 백운동의 12절경을 시로 지어 백운첩(白雲帖)을 남겼다. 현재 건물은 백운첩에 담긴 백운동도와 시문을 바탕으로 옛 모습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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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일주문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다산과 혜장이 걸었던 우정의 길을 걷다

200여 년 전 다산과 혜장이 걸었던 그 길을 걸었다. 나이와 종교를 초월해 참된 우정으로 쌓은 길.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1㎞ 남짓한 산길이다. 400m가 조금 넘는 야트막한 만덕산 허리춤에 놓인 길로 두 개의 고개를 살포시 넘는다. 고개는 높지 않아 봄 소풍 가는 기분으로 걸으면 30분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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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홍매화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마음 한 구석 의지할 곳 없는 힘든 유배지에서 서로의 마음을 넉넉히 품어줄 벗을 만난 건 두 사람에게 큰 행운이였을 게다. 특히 다산에게 혜장은 든든한 버팀목이였을 것이다. 두 사람이 발자취를 찾아 백련사를 찾았다. 백련사에서 출발하는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이 많아 좀 더 수월하다. 백련사 주차장에 도착하자 ‘만덕산 백련사’ 현판이 달린 일주문이 먼저 반긴다. 일주문을 지나자 1500여 그루의 동백숲이 펼쳐진다. 양옆으로 늘어선 동백나무에는 무성한 가지와 잎 사이로 붉은 꽃이 유난히도 화려하다. 아무렇게나 뚝뚝 떨어져 버린 꽃은 처연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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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만경루와 300년 수령의 배롱나무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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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루의 현판글씨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추사 김정희가 극찬한 명필이다.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백련사는 원래 만덕사로 신라 문성왕 때 무염국사가 창건했다. 그 후 절이 없어진 옛터에 요세스님이 중창했다. 그 후에도 왜구의 침략과 화재를 겪으면서 소실된 절을 여러차례에 걸쳐 중창해 오늘에 이르렀다. 절 한가운데는 300년 된 배롱나무가 기품있게 서 있고 그 뒤로 웅장한 만경루가 대웅보전을 가로막듯 자리했다. 만경루와 대웅보전의 현판 글씨는 꿈틀대듯 쓰인 모습이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다.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추사 김정희가 극찬한 명필이다. 제주도 귀양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른 추사가 ‘글씨 같지도 않은 글씨’라며 힐난했다가 유배생활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러 보고는 ‘천하 최고의 글씨를 몰라봤다’며 자신을 한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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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동백숲길. 아무렇게나 떨어진 동백이 붉은 카펫을 펼쳤다.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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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강진만이 호수처럼 아련하게 자리했다.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길. 동백숲길이 이어진다. 어둑어둑한 숲길엔 뚝뚝 떨어진 동백이 카펫을 펼쳤다. 아무렇게나 뿌려놓은 듯한 동백은 바위와 돌틈, 사리를 모셔놓은 부도에도 피어났다. 화려해서 더 처연한 동백숲길을 지나면 봄 햇살 가득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산아래로 드넓게 펼쳐진 차밭을 마주하고 차밭 너머로 강진만이 호수처럼 자리했다. 만덕산은 차나무가 유독 많아 다산(茶山)이라고도 불렸다. 그의 호도 이곳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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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각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첫 번째 고개를 넘으면 강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층 누각 ‘해월루’를 만날 수 있다. 대나무 숲길을 따라 내려가면 정자 ‘천일각’이 강진만을 굽어보고 있다. 천일각은 다산을 기리는 마음으로 강진군이 1975년에 세운 정자다. 당시 정약용은 이곳 언덕에 올라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망향의 한을 달래고 흑산도에서 유배중인 형 정약전과 돌아가신 정조대왕을 그리워하며 눈물 삼켰다. 특히나 이곳에서 바라본 풍경이 고향(남양주시 조안면)과 닮아있어 자주 찾았다고 한다. 천일각을 지나면 바로 다산초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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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18년의 유배기간 중 10년을 이곳 다산초당에서 보냈다.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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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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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직접 팠다는 ‘약천(藥泉)’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초당(草堂)은 이름과 달리 기와를 얹은 와당(瓦堂)이다.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무너진 초당을 복원해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다산초당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동암에 걸려있는 현판은 다산의 글씨를 각각 집자해 만들었다. 경내에는 다산사경(茶山四景)으로 불리는 다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초당 왼쪽 산기슭 바위에 다산이 직접 새긴 ‘정석(丁石)’이란 글씨다. 두 번째는 초당 뒤편의 ‘약천(藥泉)’으로 촉촉이 젖어있는 것을 보고 다산이 직접 파서 만들었다는 샘이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으로 다산은 이 물로 차를 끓였다. 세 번째는 마당 한가운데 자리한 커다란 돌 ‘다조’다. 솔방울로 불을 피워 차를 끓이던 일종의 차 부뚜막이다. 마지막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으로 연못 한가운데는 쌓아올린 돌탑을 말한다. 다산이 바닷가의 돌을 주워 쌓아 올리고 석가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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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을 오르는 돌계단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다산초당은 풍광도 좋지만 그가 이루어낸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한 업적과 혼이 살아 숨 쉬는 실학의 성지다. 다산은 18년 유배생활 중 10년을 이곳에서 보내며 끊임없이 학문에 몰두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도 이곳에서 썼다. 위대한 정치가이자 철학자, 과학자였던 그가 이곳 강진 땅에서 이뤄낸 업적이 태산일진대 만약 조정에서 조선을 개혁했다면 어찌 됐을까. 우리 역사가 새로 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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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초상화. 수묵인물화의 대가 김호석 화백의 작품이다. 황철훈기자 color@sportsseoul.com

다산이 이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해남 윤씨와의 인연 덕이다. 순조 1년(1801년) 다산의 나이 40세에 강진땅으로 유배 와서 처음 머문 곳은 동문 밖 주막집이었다. 다산은 머물던 주막집 방을 생각(思), 용모(貌), 언어(言), 행동(動) 네 가지를 반듯하게 하라는 뜻인 ‘사의제(四宜齊)’로 이름 짓고 4년을 머물렀다. 그 후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귤동마을 윤단의 도움으로 초당에 머물게 된다. 애초 초당은 윤단과 그 아들들의 산정(山亭)이였다. 윤단은 손자들을 가르칠 요량으로 정약용을 초빙한 것이다. 다산과 해남 윤씨와의 인연을 더 얘기하자면 정약용의 어머니가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손녀다.

다산초당에서 귤동마을로 내려오는 길은 가파른 돌계단 길을 먼저 마주한다. 하늘로 쭉 뻗은 아름드리 소나무와 삼나무가 늘어선 길을 내려가면 수백 년 된 소나무 뿌리가 이리저리 얽혀 계단을 이룬 일명 뿌리길이 이어진다. 수많은 사람의 발길에 약해질 법도 한데 생채기를 견디며 더없이 강하고 질겨졌다. 무한한 생명력과 강인한 그 뿌리에서 다산의 정기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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