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조은별 기자] “2019년에 이 노래를 부른 적이 있어요. 제게는 의미가 큰 곡인데 당시 긴장한 탓에 잘 못 불렀어요. 언젠가 우리 콘서트에서 멋지게 부르고 싶었는데 10주년이라는 시간을 가장 값지게 돌아볼 수 있는 곡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선곡했어요.”

지난 7일 서울 송파구 잠실 실내 체육관. 밴드 잔나비의 보컬 최정훈은 이렇게 곡을 소개한 뒤 조용히 눈을 감고 내레이션을 읊조렸다. 그가 부른 곡은 지난 7월 타계한 故김민기의 ‘봉우리’. 한국 대중문화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큰 어른’의 곡이자 잔나비가 넘어야 할 ‘봉우리’였다.

잔나비는 지난 2019년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스페셜 무대에서 이 노래를 선곡했다. 당시 곡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부담이 내내 잔나비의 가슴을 짓눌렀다.

결국 10주년 콘서트인 ‘판타스틱 올드 패션드 2024 : 무비스타라이징’에서 다시금 ‘봉우리’를 소환했다. 그간 20세기 음악에서 음악적 해법을 찾아오며 특유의 예스러운 음악색을 지켜온 잔나비다운 선곡이었다.

실상 지난 10년간 이들은 수많은 봉우리를 넘어야 했다. 데뷔 초에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무명생활을 버텨야 했다.

2019년 발매한 2집 ‘전설’이 신드롬적인 사랑을 받으며 대중에게 자신들의 이름과 음악을 알릴 무렵 악재가 찾아왔다. 예능 프로그램 출연으로 이름을 한 번에 널리 알린 게 독이 됐다. 멤버들도 각종 구설에 휘말렸다.

방송활동이 저조해 예능 프로그램 제작진이 짜놓은 설정과 상황이 대중에게 얼마나 자극적으로 다가갈지 몰랐던 인디 밴드의 패착이었다. 가족문제가 얽힌 ‘연좌제’기도 했다. 5인조로 출발한 멤버들도 연달아 탈퇴했다. 2019년은 이들에게 가장 기쁜 해이자 힘든 해였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겨낸 건 음악에 대한 이들의 진심, 이들의 음악을 아끼는 팬들과 평단의 호평, 그리고 최정훈의 친형 최정준 페포니뮤직 대표의 뒷받침이었다. 특히 최정준 대표의 역할이 컸다.

대학에서 체육을 전공한 뒤 한 신문사에서 잠시 기자로 일했던 최 대표는 동생 최정훈이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하자 직장을 퇴사하고 잔나비를 뒷바라지 했다.

그는 매니저와 홍보 역할을 모두 도맡으며 당시 잔나비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방송가와 매체를 분주히 찾아다녔다. 방송사, 언론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혼자 그 모든 일을 커버하는 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는 ‘슈퍼히어로’에 가까운 격무였다.

팀이 무명 시절, 동생보다 더 미남이라는 평판을 듣는 최 대표가 멤버들을 데리고 현장에 가면 관계자들이 그를 멤버로 착각했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그는 지금도 방송국에 가면 대기실 문 앞에 붙인 ‘잔나비 대기실’이라는 A4용지와 큐시트를 모두 챙겨 고이 간직하고 있다. 무대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잊지 말자는 마음에서다.

힘겨웠던 시간을 함께 버텼던 이들은 마침내 손에 손을 잡고 그 봉우리에 올랐다. 지난 8월, 인천펜타포트록페스티벌에서 밴드로서 최고의 정점인 헤드라이너 무대에 올랐다.

보컬 최정훈은 톱배우 한지민과 열애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기타 김도형도 훌쩍 물오른 기타 실력과 무대매너로 잔나비의 한 축을 든든하게 지켰다.

이들이 성장하기까지 최 대표는 가루가 되도록 자신을 아낌없이 갈아 넣었다. 이들의 공연을 관람한 싱어송라이터 조동희는 “최정훈의 음악에 대한 진심, 착한 마음, 그리고 형이자 페포니뮤직 대표인 최정준의 디테일이 돋보이는 배려심”이라고 적기도 했다.

180분동안 30곡을 불렀던 ‘판타스틱 올드 패션드 2024 : 무비스타라이징’ 무대는 새로운 로큰롤제왕의 대관식이었다. 왕관은 세 개였다. 최정훈, 김도형, 그리고 최정준 실장까지. 함께하기에 다음 봉우리도 두렵지 않은 이들이다. mulgae@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