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혜작가
캐리커쳐 작가이자 다운증후군 배우 정은혜가 4일 경기 양평 리버마켓에서 스포츠서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양평 |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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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양평(경기)=조은별기자]“영희와 닮은 점? 한지민!!!”

우문에 현답이었다. 극 중 영희와 닮은 점을 물으니 ‘한지민’이라는 답이 돌아올 줄이야. 생각해보면 한지민이 연기한 영옥과 쌍둥이 자매니 당연히 어딘가 닮았을 텐데 말이다.

다운증후군 캐리커처 작가 정은혜(32)는 요즘 웬만한 연예인보다 화제의 인물이다. 그는 지난달 22~28일 방송된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14·15회에서 다운증후군 환자 영희 역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남들과 다소 다른 외모, 말투 때문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그로 인해 상처받고, 때로 버려지기까지 했던 영희의 아픈 과거사는 정 작가의 몸짓과 어눌한 말투를 통해 고스란히 안방 시청자들에게 전달됐다.

울림은 컸다. “드라마 보고 울고, 댓글 읽고 또 울었다”, “드라마에서 다큐의 감동이”, “은혜 씨 미소도 예쁘고 목소리도 좋아요”라는 칭찬의 글이 달렸다. 정 작가는 요즘 인기를 100% 실감한다고 했다.

정 작가가 처음 드라마 출연 제안을 받은 건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다운증후군 환자 취재 차 정 작가를 찾아온 노희경 작가가 내친 김에 드라마 출연까지 제안했다.

정 작가는 “‘괜찮아 사랑이야’, ‘빠담빠담빠담’같은 노작가의 드라마를 즐겨 보곤 했다”면서도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다소 당황했다”고 했다. 드라마 출연 제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촬영은 지난해 가을, 제주에서 진행됐다. 그는 “대사 외우는 건 전혀 힘들지 않았다”며 “주변에서 잘한다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쌍둥이 동생 역의 한지민은 정 작가에게 ‘정말 귀엽고 연기도 잘한다’고 칭찬했고 영옥의 연인 정준 역의 김우빈은 “프로”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영화 ‘기생충’을 통해 얼굴을 알린 배우 이정은, 평소 친분이 있던 양희경, TV에서 보던 김혜자, 고두심과의 연기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실상 ‘우리들의 블루스’는 정 작가의 세 번째 출연작이다. 그는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지원한 옴니버스 인권영화 ‘다섯개의 시선’중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를 통해 스크린 데뷔식을 치렀다.

정 작가의 아버지인 서동일 감독은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를 촬영할 때만 해도 은혜가 15살이라 감정 컨트롤이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촬영시간에 알람을 맞춰놓고, 새벽에 기상해 스태프, 배우들과 즐겁게 촬영하고 왔다”고 귀띔했다.

현장에서는 ‘연기천재’로 칭찬받았지만 막상 완성된 드라마를 시청한 뒤 펑펑 울었단다. 정 작가는 “나 때문에 영옥이랑 정준이가 싸우는 장면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영희를 향해 모진 말을 한껏 쏟아내는 영옥, 마당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캐리커처를 그리던 영희는 영옥의 속내를 들으며 눈물을 쏟아낸다. 차마 소리조차 내지 못해 숨죽여 울던 그 모습은 아마도 정 작가가 살면서 겪었던 수많은 나날 중 하루였을지 모른다.

촬영이 진행되던 지난해 11월 18일은 정 작가의 생일이었다. 모든 출연진과 스태프들이 정 작가에게 “생일 축하한다”며 파티를 열어줬다. 생일선물로 물감을 받은 정 작가는 모든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얼굴 한 장 한 장을 그려 선물했다. 선물이지만 일부 스태프들은 한사코 비용을 지불했단다. 노희경 작가의 초상화도 그렸다. 정 작가는 “노희경 작가님은 마음이 따뜻한 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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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혜 작가의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굳은살이 박혀있다. 양평|황혜정 기자

◇그림은 정은혜 작가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

정 작가의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굳은살이 박혀있다. 주말마다 20명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주다 생긴 훈장이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폭염, 폭설, 폭우에도 끄덕 않고 경기도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의 한 부스를 지킨다. 평일에는 양평의 한 복지관에서 근무한다.

보통 사람도 제법 감당하기 힘든 스케줄이지만 정 작가는 그림 그리는 시간을 즐긴다. 때로 체력적으로, 감정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순간도 있지만 함께 부스를 지키는 엄마 장차현실 작가에게 한번 ‘버럭’ 한 뒤 다시 자신을 다스린다. 인터뷰하는 날도 이미 그림 신청이 마감됐는데도 “서울에서 2시간 걸려 왔다”는 시민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특히 어린이 손님들의 부탁에 약했다.

이런 정 작가의 일상은 23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니 얼굴’에 고스란히 담긴다. ‘니 얼굴’은 정작가의 아버지인 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다큐멘터리로 2020년 제 25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이다. 당초 그 해 개봉하려고 했지만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사태와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출연 요청으로 영화 개봉도 자연스럽게 연기됐다.

다큐멘터리는 다운증후군 환자 정은혜가 아닌 인간 정은혜의 일상을 3년여에 걸쳐 그린다. 서 감독은 “은혜가 그림을 배우지 않았던 10대 시절, 방에서 뜨개질을 하고 상상의 친구들만 만났다”며 “그림은 정 작가가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 통로”라고 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뜨개질을 하던 모습은 정 작가의 평소 모습 그 자체였던 셈이다.

정 작가는 ‘니 얼굴’에서 김광석, 김정호의 노래를 즐겨 부른다. 평소 좋아하는 가수를 묻자 “채은옥, 혜은이, 이선희, 이은하, 이은미, 인순이, 봄여름가을겨울, 신촌블루스, 이정선, 한영애 정수라, 진미령”의 이름을 숨도 쉬지 않고 댔다. 7살 때 가수 김광석의 노래를 처음 접한 뒤 그 우울한 정서에 홀딱 반했단다. 요즘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는 나훈아의 ‘사랑’이다.

다큐멘터리에서 정 작가는 “나는 왜 장애로 태어났을까”라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엄마와 티격태격 다투곤 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제 자신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내가 그림을 그리니까, 사람들이 나를 기억한다”며 그림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엄마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유명하고 멋있는 나의 스타”라고 표현했다.

서 감독은 “미디어에서 은혜의 존재가 ‘의지하는 존재’로 비쳐지길 원치 않는다”며 “장애인이 받는 소외, 차별, 배제가 아닌 인간 정은혜의 매력을 봐달라”고 당부했다.

정 작가는 영화 개봉에 이어 8월 23일부터 29일까지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포옹전시회를 열며 바쁜 나날을 이어간다.

mulgae@sportsseoul.com

사진|최승섭 기자 thunder@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