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오래 살다보니까 이런 날이 있네요.”
연기인생 70년, 90세 노(老)배우 이순재의 울음 섞인 소감에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머리 위엔 하얀 눈이, 얼굴엔 세월의 주름진 흔적이 뒤덮었다. 고작 7개의 계단이었지만,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했다. 80세를 앞둔 김용건이 무대 아래에서, 60세가 넘은 최수종이 무대 위에서 손을 꼭 붙잡고 앞과 뒤를 받쳤다.
‘2024 KBS 연기대상’ 영예의 대상은 이순재였다. KBS 최초의 수상이자, 최고령 수상자다. 1970년 TBC 연기대상 대상 수상 이후 54년 만에 두 번째 대상이다.
‘공로상’이 아닌 ‘연기대상’이다. 특유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이 상의 의미를 짚었다. 이순재는 “아름답고 귀한 상을 받게 됐다. 1980년 언론통폐합 뒤에 KBS에 출연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지만 늘 준비하고 있었다”며 “아카데미를 봐라. 60세를 먹어도 잘하면 상을 준다. 연기를 연기로 평가해야지, 인기로 평가하면 안 된다”고 말하자 객석 아래 후배들은 박수갈채로 화답했다.
고령에도 연기 열정은 식지 않았다. 대상 수상작인 ‘개소리’ 역시 경남 거제까지 4시간 반 이상 걸리는 거리를 20회 이상 왕복하며 촬영했다. KBS 연기대상은 대배우에 대한 헌사이기에 더욱 값지다.
이순재는 자신이 재직 중인 대학교의 학생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했다. ‘개소리’ 촬영으로 자주 자리를 비워야 했기에 그는 “교수 자격이 없다. 미안하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학생들이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처럼 드라마를 하시는데 잘하세요”라며 격려했다고 전했다. 이순재는 “그 학생들을 믿고 오늘의 결과가 나왔다”며 마침내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타고 구불구불 흘렀다.
배우의 길을 올곧게 걸어왔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연기 생활을 시작한 뒤 드라마 175편, 영화 50편, 연극 100여 편에 출연했다. 대선배가 된 뒤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따끔한 일침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엄격할 것을 주문했다. 지난해 열린 백상예술대상에서도 이순재는 “연기를 아주 쉽게 생각했던 배우들, 이만하면 다 된 배우 아닌가 하는 수백 명의 배우가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없어졌다”고 일갈했다.
대중문화계 사표(師表)로 평가받는 건, 그가 걸어온 길이 곧 K-드라마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 역대 평균 시청률 1위(59.6%)를 자랑하는 MBC ‘사랑이 뭐길래’(1991)에서 대발이 아버지로, ‘허준’(1999)에서 스승 유의태 역으로 출연해 최고시청률 64.8%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거침없이 하이킥’(2006)에선 ‘야동순재’로 불리며 친근한 이미지로 대중과 소통했다.
평생을 걸쳐 일군 밭에서 이제 후배들이 날개를 달고 전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순재는 “보고 계실 시청자 여러분께 평생 신세를 많이졌다”고 수상소감을 끝맺었다. socool@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