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조은별기자]“기뻐하라, 우리가 정복했다.”

기원전 490년. 아테네 북동쪽 마라톤 광장에서 고작 1만 명의 병력으로 10만 페르시아 대군에게 승리를 거둔 아테네군은 고향에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병사를 급파한다. 한시라도 빨리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단숨에 약 40㎞를 뛰어온 병사는 승리의 소식을 전한 뒤 가쁜 숨을 몰아쉬다 생을 마무리했다. 1896년 근대올림픽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마라톤에 얽힌 전설이다.

한국인 최초 올림픽 마라톤 대회 우승자인 손기정 옹과 그의 제자 서윤복의 스토리를 영화화한 ‘1947보스톤’의 강제규 감독도 승전보를 전한 아테네 병사마냥 관객에게 환희와 승리의 역사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이 영화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왜 지금 시기에 손기정, 서윤복이냐고요? 우리 민족에게 아픔과 좌절, 슬픔의 역사가 많았잖아요. 광복 뒤, 독립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채 미군정의 지배를 받고, 국민들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극한의 대립을 하던 시기, 꼭 태극기를 달고 뛰겠다는 남다른 의지를 지닌 청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도 환희와 기쁨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죠.”

영화는 손기정 옹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챔피언. 조선인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하지만 손기정이라는 이름대신 손 기테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해야 했던 청년 손기정은 월계수 잎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다 강제 은퇴 당해 다시는 뛸 수 없게 된다. 이후 10여 년간 방황하던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이자 지도자 생활을 하는 남승룡의 소개로 재능있는 후배 서윤복을 만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배우 하정우, 배성우, 임시완은 놀라운 싱크로율로 관객을 역사의 한 페이지로 안내한다. 강감독은 “실존인물을 다뤄야 하기 때문에 외적 조건이 1순위였다”며 “특히 서윤복 역의 임시완은 외모와 신체조건은 물론 서윤복 선생의 대쪽같은 성품까지 닮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윤복 선생은 신념이 강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정상의 위치에 서면 부와 명예를 탐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돈과 명예, 권력에 전혀 관심이 없던 청렴결백한, 천생 선비였죠. 임시완은 대화를 나누면 연기 외에는 관심이 없고 욕심도 없고 순수한 면이 돋보이는 친구에요. 서윤복 선생과 일맥상통하죠. 캐스팅 뒤부터 촬영이 끝나는 8개월동안 혹독하게 식단을 진행하고 수도승같은 삶을 살며 외적인 모습까지 유사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는 저도 촬영이 기다릴 정도로 설렘과 만족을 선사했죠.”

영화는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과 더불어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당시 동메달리스트 남승룡까지 비중있게 그렸다. 강감독은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된 여러 이유 중에 남승룡에 대한 매력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역사는 2등과 3등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마라톤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이 남자의 사연이 강하게 와닿았죠. 대다수 관객들이 서윤복과 손기정에 몰입하겠지만 남승룡 역시 응원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1년 설 무렵 개봉을 목표로 2019년 촬영을 마쳤던 영화는 4년의 기다림 끝에 뒤늦게 관객에게 선보이게 됐다. 촬영부터 난관을 넘어야 하는 곡절 투성이었다. 호주에서 진행한 마라톤 풀코스 로케이션은 당시 산불사태로 인해 원활한 촬영이 불가능했지만 배우들의 꽉 짜인 스케줄 때문에 촬영을 강행해야 했다.

강감독은 “촬영을 마치자마자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발발했다. 만약 당시 촬영을 연기했다면 이 영화는 지금까지 촬영이 기약 없이 미뤄졌을 것”이라고 웃었다.

남승룡 역의 배성우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자숙했던 시간, 강감독은 “본인만 하겠냐만 나도 그 시간들이 혹독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강감독은 그 시간동안 방망이 깎는 노인마냥 영화의 만듦새를 고민하며 다듬고 또 다듬었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쉬리’(1999)와 1000만 관객을 동원한 ‘태극기 휘날리며’(2004) 등 웅장한 ‘국뽕 영화의 1인자’로 꼽히는 강감독이지만 ‘1947 보스톤’은 비장미를 줄이고 담백하게 사건에 접근했다. 4번에 걸쳐 블라인드 시사회를 가질 만큼 젊은 세대와 소통을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1947보스톤’은 강감독이 ‘장수상회’ 이후 8년만에 선보이는 영화다. 환갑을 넘긴 한국 영화계 거장은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영화는 물론 드라마도 준비 중이다. 문제는 팬데믹 이후 한국 영화 산업의 구조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다는 점이다.

강감독은 “이렇게 영화계가 머리를 맞대 위기의식을 논하는 건 최근 10년 사이 처음이다”라며 “결국 콘텐츠의 문제인 만큼 이번 추석이 한국영화계에 터닝포인트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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