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성 교수
한양대 이종성 교수가 본지 ‘데스크와 만난 사람’ 인터뷰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eoul.com

[스포츠서울 위원석 체육1부장]한국축구사에 길이 남은 소중한 ‘거작’이 한권 출간됐다. 최근 유럽의 학술서 전문 출판사인 ‘피터 랭(Peter Lang)’에서 나온 ‘남북한 축구사 1910년부터 2002년까지:발전과 확산(A History of Football in North and South Korea c.1910-2002 Development and Diffusion)’이 바로 그 책이다. 남북한 축구를 통사적으로 다루면서도 체계적인 분석틀로 천착한 책은 과문하지만 아마도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특유의 방대한 일차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축구사를 다룬 ‘축구는 한국이다’는 책이 있지만, 해방이후 북한축구에 대한 내용은 1966년 월드컵 정도만을 짧게 다루고 있다. 남과 북에서 축구가 그 사회(더구나 서로 다른 사회구성 이념을 갖고 있는 두 체제내에서)의 변화를 반영하고, 또 변화를 추동하는 역동성을 함께 담아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아무리 추켜세워도 부족함이 없다.

저자는 현재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에 재직중인 이종성(44) 교수다. 이 교수는 영국의 드 몽포트(De Monfort )대에서 스포츠문화사로 석박사 과정을 마쳤는데 남북한 축구사로 박사 학위논문을 썼고, 이후 피터 랭 출판사의 권유로 1년 6개월 동안 학위논문을 대폭 보강해 이 책을 펴냈다. 국내에는 아직 이 책의 출간 소식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또 영어로 써진 책이다보니 그 내용은 더욱 축구팬에게 소개되지 않았다. 지난 3월 30일 이 교수와 2시간여의 인터뷰를 진행한 이유는 조금이라도 이 책에 담긴 내용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매체인 ‘프레시안’에서 5년 정도 스포츠기자로 활동하다가 스포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2008년 영국 레스터에 있는 드몽포트대 스포츠문화사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고 하는데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무엇이 그리 목말랐는가.

기본적으로 스포츠를 너무 좋아했고 학부때부터 스포츠기자를 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내가 인터넷매체에서 기자로 활동하다보니 취재 환경과 고급정보를 듣는 루트가 한정돼 있었다. 하고 싶은 취재를 많이 못했고,외신 위주 기사를 쓰면서 한계도 느꼈다. 2006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국제축구연맹(FIFA)에 직접 취재 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를 검색하다보니 드몽포트대학에 대해서 알게 됐다. 스포츠경영보다는 스포츠역사에 개인적인 관심이 많았는데 드몽포트대가 기자로서 내 성향과 맞아떨어졌다. 참고로 드몽포트대는 최근 박지성도 들어간 FIFA 행정가 최고위 과정에서 축구역사를 맡고 있다. FIFA와 대학에 나란히 지원을 했는데 모두 됐다. 그래서 독일월드컵 현지 취재를 마친뒤 그해 9월부터 석사과정에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했다.

-스포츠문화사(Sport History and Culture)라는 것이 국내에는 조금 생소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다루는 학문인가.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국내 프로스포츠에서 야구와 축구의 문화적 위치가 왜 다를까를 생각해 본다. 축구는 월드컵때문에, 또 지면은 안되는 일본과 북한이라는 존재때문에 국가주의적 정서가 강했다. 그래서 (프로스포츠로서는)축구가 불리한 상황에서 시작했다. 반면 야구는 축구에서 국가대표팀 경기의 자리를 고교야구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문화적 차이가 (프로스포츠의)마케팅 계획이나 전략을 짜는 것보다 선행됐다는 것이다. 각 스포츠가 왜 나라마다, 또 시기마다 달랐으며 그것이 지금까지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 가를 연구하는 것이 스포츠문화사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 석사 학위 논문도 축구로 썼는가.

아니다. 석사 학위 논문은 1970년대와 80년대 사이의 지역차별과 한국야구 발전이라는 주제로 썼다. 1970년대 들어 군산상고와 광주일고를 앞세운 호남야구가 처음으로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기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영남권과 수도권이 우승을 나눠가졌는데 호남야구가 70년대 들어 고교야구를 제패하면서 진정한 전국화가 이뤄지게 됐다. 이러한 분기점이 없었다면 그 이후 프로야구가 시작했을 때 과연 이렇게 연착륙을 할 수 있었겠는가를 다룬 논문이었다. 어렸을 때 워낙 야구를 좋아했고 동대문운동장을 많이 찾았다. 당시에도 미디어가 야구에 많이 집중했다. 고교야구에 대한 추억때문에 그런 논문을 썼던 것같다.

-박사 과정에 들어가서 일제강점기부터 2002년까지의 남북한 축구역사를 주제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유학을 한 곳이 영국이었으니 당연히 축구를 주제로 하는 것이 지도를 받는데 유리했다. 또 우리 대학에는 축구역사에 대한 권위있는 교수진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석사학위를 마치고 일시 귀국했을 때 부친이 위암으로 투병중이었는데 박사까지 공부를 하려면 이왕이면 축구를 주제로 하라고 권유하셨다. 축구팬이셨던 부친은 축구가 사회변화를 더 깊숙히, 많이 담아낼 수 있다고 조언하셨다. 또 학위 주제를 정하기 전에 교수진에게 제안서를 내야 했는데 남북한이라는 분단된 환경속의 축구역사를 다룰 수 있는 사례가 세계적으로도 희귀했다. (통일을 준비하고, 통일된 이후에도)연구 결과가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일제 강점기때 일차 자료를 찾아보다 보니 당시부터 경성과 평양으로 대표되는, 축구적으로는 이미 두개의 나라가 있었다는 생각도 했다. 다행히 제안서를 교수님들이 흔쾌히 받아주셨고 연구가 어렵지 않게 진행될 수 있었다.

-대한축구협회가 펴낸 한국축구백년사에 따르면 국내에 축구가 들어온 것은 1882년(고종 19년) 인천 제물포에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가 입항해 축구를 즐기던 것을 아이들이 따라했던 것을 시원으로 본다. 연구 시기를 굳이 1910년부터 2002년으로 특정한 이유는.

일단 플라잉 피시호 기원론은 공식문서로 남은 기록은 없고 일종의 구전이라고 본다. 내가 (통설을)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확실히 그렇다고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대신 축구가 대중적으로 확실한 의미를 가진 것은 일제가 공식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한 다음이라고 판단해 1910년부터를 담았다. 또 2002년까지 남북한 축구가 보여준 드라마는 어느 정도 나왔다고 생각해서 시기를 정했다.

-책 제목을 ‘남북한 축구사 1910년부터 2002년까지:발전과 확산’으로 번역할 수 있겠는데 제목에서 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일단 확산이라는 측면이 중요했다. 식민지 시대에서 축구라는 종목이 우리처럼 확산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축구 확산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나게 이뤄진 것은 사실이었고 이런 측면에서 확산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또 북한의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은 세계축구사에 큰 임팩트를 줬다. 국내에서는 당시 북한의 활약을 편하게 보도할 수 없는 시절이었지만 세계언론, 특히 영국언론을 찾아보면 엄청난 센세이션을 줬던 대사건이었다. (이런 이유로)남북한 축구를 분리해서 다룰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책 내용으로 좀 들어가보자. 우선 이번 연구를 통해서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새롭게 밝혀진 부문이 있었나.

우선 일제 강점기부터 우리 나라가 이미 축구적으로는 두개의 중심축이 있었던, 나눠져 있었던 상태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일제 강점기때 경평전이나 전조선 축구대회같은 대형 이벤트가 경성 중심으로 열렸다고 알렸지만 평양에서도 전조선 축구대회가 열렸다. 축구적으로는 두개의 중심축이 이미 있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대영제국으로 묶여있지만 축구적으로는 전혀 다른 나라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거기는 민족이라도 달랐지만 우리는 같은 민족이었음에도 축구적으로는 이미 반분단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말하자면 라이벌의식이고, 세계 선진 클럽의 대부분이 그런 라이벌 의식으로 리그의 토대를 만든 것인데, 우리는 어찌보면 (남과 북의 라이벌의식이)국가 대 국가의 대항전으로 숙명적으로 바뀐게 된 셈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분단의 환경이 아니었다면 지금 K리그의 모습은 상당히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경성의 경신중이나 평양의 숭실중이 가졌던 오래된 라이벌 구도가 계속 지속됐다면 K리그에 주는 의미부여가 사뭇 달랐을 것이다. 요즘 ‘구도’라고 하면 야구때문에 부산을 떠올리지만 일제시대 언론에 나온 표현을 살펴보면 구도는 대부분 평양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전조선축구대회가 열리면 평양에서는 ‘축구명절’이라는 식의 표현이 많이 나올 정도로 축구열기가 대단했다. 이런 점들을 구체적인 사료를 통해 많이 찾으려고 노력했다.

또 1966년 월드컵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는데 북한이 월드컵 역사에 행정적으로,제도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임팩트를 줬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1966년 월드컵에서 아시아,오세아니아 두 대륙 예선에 참가한 나라는 두 나라뿐이었다. 바로 북한과 호주였다. 제3국인 캄보디아에서 예선이 열려 북한이 승리해 본선에 나갔다. 한데 당시 예선전에서 아프리카 국가들이 전부 보이콧을 했다. 원래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세 대륙에게 주어졌던 본선 티켓이 2장뿐이어서 아프리카 국가들이 모두 보이콧을 한 것이다. 만일 아프리카 국가들이 참가했다면 북한의 본선 진출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본선에 나간 북한이 이탈리아를 이기고 포르투갈과 명승부를 펼치는 것을 본 후안 아발란제가 직감을 하게 된다.

(1974년부터 1988년까지 FIFA 회장을 맡은)아발란제는 자신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게 본선 티켓을 확장하고 공략한다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본다. 이런 (월드컵의)글로벌화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 북한이었고 영국 언론의 평가가 대부분 그렇다. 재미있는 것은 1966년 월드컵의 최대 스타가 포르투갈의 에우제비오였는데 그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모잠비크 출생이었다. 당시 포르트갈 대표팀에 모잠비크 출신이 5명이나 있었다. 1966년 월드컵에서 북한과 에우제비오의 대활약을 본 영국의 ‘데일러 미러’는 ‘1974년 월드컵에서 4강은 아마도 중국,모잠비크,가나 그리고 당연히 북한’이라는 농담섞인 논평을 했다. 그 정도로 북한이 월드컵 글로벌화를 위한 역할을 했고 그 틈새의 아이디어를 아발란제가 얻어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책의 1장은 일제 치하에서의 조선 축구 발전을 다루고 있는데.

우선 언론이 큰 역할을 했다. 조선일보,동아일보 그리고 여운형 선생이 운영했던 조선중앙일보 등이 모든 축구 메이저 대회를 개최하거나 후원했다. 부수경쟁때문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독립정신을 나타낼 수 있는 분야로 축구를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야구는 그런 식으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야구에서 일본을 이기기는 힘들었으니까. 언론들이 축구를 열성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 대학팀 초청 경기 등이 흥행에서도 크게 성공했다. 신문 외에 미션스쿨같은 기독교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평양이 축구도시로 성장한 배경으로는 두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선 상공업이 발전한 도시였다.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평양이 ‘한국의 맨체스터’같은 역할을 했다. 공장지대 노동자들이 장비가 필요한 야구 대신 축구를 했고, 공장주들도 이를 독려했다. 우리에게도 영국 같은 모델이 아주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하나 당시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기독교세가 강했다. 기독교인들이 전도의 도구로 영어교육과 스포츠, 특히 축구를 매개체로 활용했다. 주일학교가 축구 전파에 큰 역할을 했다. 한 신문을 보면 ‘축구대회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로 평양 시내 교회들이 일제히 종을 쳐서 알렸는데 그 소리가 너무 장엄했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다.

마지막으로 일제시대 축구의 후원자들이 대부분 대지주 계급이었다. 이들은 축구를 좋아했다기 보다는 축구를 근대의 상징으로 여겼다. 계몽이나 독립운동을 하는데 축구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갖고 후원을 했다. 이런 과정 등을 거쳐 자연스럽게 축구가 국가주의적인 정서를 넘어서 대중적으로도 입지를 갖게 됐다.

-2장에서는 1945년부터 64년까지 시기를 ‘격동의 시간들’로 다루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격동이었나.

이 시기에 해방이 있었고, 분단이 있었고, 전쟁이 있었다. 남한에서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0혁명, 이어서 5·16 쿠데타가 있었다.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이 있었고 북한체제에서는 살 수 없었던, 그러나 평양 축구를 주도했었던 기독교와 지주계급들이 남한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남한축구를 나중에 이끌었던 최정민도 1·4후퇴때 북에서 내려왔다. 축구적으로 보면 남한은 국내에서 열렸던 1960년 아시안컵을 기점으로 최저점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반면 북한은 천리마운동과 연결시켜 대표선수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 시스템을 정착시키고 있었다. 늘 함께 운동하면서 완벽한 기계처럼 움직이는 팀을 사회주의 시스템으로 만들어나간 것이다. 이들이 결국 1966년 월드컵에서 사고를 치게 된다. 마지막 경평전이 해방정국에서 벌어지게 되는데 이후 많은 북쪽 선수들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1954년에 스위스 월드컵 예선을 일본과 치르게 되는데 한국대표팀에서 크게 활약했던 주영광 최정민 같이 많은 선수들이 북한출신이었다. 선수 한명의 운명이 분단과 맞물려 운명적으로 바뀐 것이다. 단순히 축구만을 넘어서는 이런 여러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혼돈의 시기로 표현했다.

이종성 교수
한양대 이종성 교수가 본지 ‘데스크와 만난 사람’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eoul.com

-3장에서 드디어 그 유명한 북한의 1966년 월드컵 8강 돌풍을 다룬다. 영국에서 연구를 하다보니 실증적인 조사도 가능했을 것같은데.

영국 현지에서 신문 등 일차 자료 조사, 당시 현장을 체험한 사람들의 인터뷰 등에 든 시간만 1년 넘게 걸렸다. 당시 자료를 찾아보고 인터뷰를 하다보면 이 시간은 남북한 축구사를 다 합쳐도 우리 축구역사에 매우 중요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을 두고 각국 언론의 반응을 보면 한가지 팩트를 가지고 얼마나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지를 할 수 있다. 우선 월드컵이 열렸던 영국 자료를 보면 그들에게 북한은 축구적으로는 ‘듣보잡’이었겠지만 동시에 너무 신기한 나라였다. (북한의 예선전이 열렸던)미들즈브러 지역일간지에서 북한의 취재기자에게 칼럼을 쓸 공간을 제공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미들즈브러는 당시만 해도 영국에서 일종의 ‘천덕꾸러기’같은 신세였는데 월드컵 이후 ‘이제야 영국의 한 도시로 인정받는 것같다’는 표현이 나온다. 북한 덕분이었다. 북한에게 진 이탈리아 언론도 보도를 엄청나게 했다. 국회의원들이 (패배를)성토하고 그랬다. 이 여파로 1967년에는 (대표팀 전력강화차원에서)해외 선수들의 제한조치를 이탈리아 리그가 취하기도 했다. 반면 북한은 이탈리아를 이기고 나서 노동신문을 통해서 ‘재벌들이 이끄는 이탈리아축구는 썪었다’는 식의 기사를 썼다. 위대한 사회주의가 타락한 자본주의를 이겼다는 식의 프로파간다를 하기에는 최적의 소재였던 셈이다.

또 당시 북한이 내세웠던 주체사상처럼 우리만의 축구로 이겼다는 점을 많이 강조했다. 국내에서는 ‘동아일보’ 장행훈 기자가 당시 현지 취재를 했는데 논문 준비 과정에서 인터뷰를 했다. 북한이 소련과 예선 첫 경기를 하는데(0-3 패배) 워낙 소련이 치사하게 경기를 해서 동아일보에 ‘반칙의 명수 소련’이라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장 기자는 북한이 이탈리아를 이겼을 때는 같은 민족으로 기뻤지만 기사를 쓰는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일종의 이율배반적인 상황이었다. 장 기자는 북한 사람들과도 매우 친해져서 현지에 있던 우리 정보부 요원에게 북한쪽 정보를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월드컵은 원래 유럽과 남미만의 잔치였는데 66년 월드컵에서 북한과 모잠비크 출신 에우제비오를 통해서 글로벌화의 첫 단계를 밟기 시작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66년부터 1973년까지 다룬 3장에서는 또 한국축구의 혁명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어떤 의미에서 혁명이라고 했는가.

이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친인척이었던 장덕진씨가 대한축구협회장을 맡으면서 한국축구가 굉장히 달라졌다. 장 회장은 축구발전만을 놓고보면(재무부 출신인 장 회장이 축구협회장을 맡으면서 우후죽순격으로 금융단 축구팀이 창단됐고, 이는 경기인들의 경제적 토대를 획기적으로 바꿔 놓은 것으로 평가된다) 천재적이었고, 제대로 드라이브를 걸었다. 물론 그 뒤에는 북한에게만은 (축구로도)절대로 질 수 없다는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조기축구도 장 회장이 붐을 일으켜서 만든 것이다. 그는 특히 영등포 지역에서 축구클럽을 활성화시켰는데 이를 바탕으로 이 지역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박스컵(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박스컵과 고교야구’라는 (히트상품)공식도 생겼다. 한국에서 축구가 국가적인 프로젝트로 확실히 자리잡은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국가대표 경기가 모든 스포츠에서 가장 큰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한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당시 축구협회 초청으로 국내에 왔던 잉글랜드 출신 그레이엄 아담스 코치가 당시 폭발적으로 창단했던 금융단 축구단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면 한국축구가 더 발전할 것이라고 지적했던 인터뷰가 있다. 예를 들어 한일은행은 대구에, 제일은행은 광주에 자리를 잡고 고교축구 출신 유망주들이 연고지 팀에 가는 형식이 그때부터 정착됐다면 아마도 K리그의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것같다. 물론 현실적으로 당시에는 모든 것이 서울중심이었으니 쉽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4장은 1974년부터 1991년을 다루는데 북한 축구의 몰락과 한국축구의 부활을 제목으로 하고 있다.

이 시기에 남북한의 역관계가 역전됐다고 본다. 최종덕 감독(전 서산FC)과 인터뷰를 했는데 북한팀에게 두려움을 안 가졌던 때가 1980년부터라고 하더라. 그 전까지는 아무래도 ‘1966년의 아우라’가 너무 컸다. 물론 그 때 뛰던 선수들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남북한이 만났는데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우리가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금융단 팀 대거 창단을 통해 환경도 좋아졌고, 좋은 멤버도 갖췄다. 그러나 막상 경기에서는 몇차례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면서 결국 비겼다. 하지만 이 경기 이후 한국은 북한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1980년대 들어서는 ‘골을 먼저 먹어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표선수들이 우리 입장에서는 ‘1966년의 악령’에서 벗어난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이 시기에 남한이 북한을 앞섰다.

반면 북한은 1966년 월드컵에 나섰던 선수들 중 일부가 숙청을 당했고 문화예술스포츠에 대한 영역을 김정일이 맡게 되면서 축구쪽에 대한 지원이 예전같지 않았다. 김정일은 체제 우위를 위한 선전매체로 축구보다 영화를 선호했다. 당연히 김일성이 주도했던 시절처럼 축구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 이전에는 축구대표팀이 최고의 대접을 받았지만 이것이 흔들린 것이다. 축구를 할 유망주들이 축구를 택하지 않고 영화쪽으로 빠지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축구를 하던 사람은 인상도 좋고 체격도 좋은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런 사람들이 영화쪽으로 간 것이다.

1966년 월드컵에서 선전 하기 이전에 축구를 후원했던 그룹에는 갑산파가 있었다. 갑산파의 우두머리격이 박금철이었다. 항일투쟁그룹이었던 이 갑산파는 이후 김일성의 견제를 받아 1967년 대거 숙청당했다. 당시 북한 축구인은 김일성만큼이나 박금철을 존경해 그를 기리는 응원가도 불렀다고 한다. 이런 후원그룹이 숙청을 당하고, 문화예술스포츠 정책을 이끄는 김정일의 개인적인 성향이 더해지면서 북한축구가 서서히 몰락의 과정을 밟게 된다.

-드디어 5장에서 드디어 2002 월드컵이 등장한다.‘1966 어게인’이라는 부제가 인상적이다.

2002 월드컵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한 경기를 꼽으라면 포르투갈전을 들고 싶지만 세계적으로는 당연히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이 최대 관심이었다. 나는 안정환의 골든골이 터지기 전부터 우리가 심리적으로 이기고 있다고 봤다. ‘어게인 1966’이라는 응원 플래카드가 큰 몫을 했다고 본다.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국가적인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당시 트라파토니 감독도 그 플래카드를 보고 강력하게 항의했다고 한다. 16강전이 끝나고 이탈리아 일간지에서 ‘1966년에는 북한에게 한대 얻어맞고, 2002년에는 한국에게 한대 얻어맞았는데 그런 점에서 남북한은 한 나라다’라는 논평을 하기도 했다.

북한도 2002월드컵의 한국경기를 녹화중계했다. 특히 이탈리아전을 중계하면서는 캐스터가 토티의 퇴장 상황 등에서 노골적으로 심판 편을 들기도 했다. 말하자면 한국편을 든 셈인데 이런 멘트를 사전 검열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나는 이것을 한국을 응원했다기 보다는 북한이 1966년의 향수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고 읽는다. 북한이 1966년에 만든 월드컵 국제화의 물꼬를 한국이 2002년에 완성했다. 한국 미국 세네갈 등 유럽과 남미를 더해 5대 대륙 대표가 나란히 8강에 든 것은 그 대회가 처음이었다. 월드컵 세계화의 수미상관을 이룬 두 대회에서 그 주역이 남북한이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

-이 책의 결론은 무엇이었나.

나는 모든 장을 네가지 앵글로 바라보고 싶었다. 하나는 당연히 내셔널리즘. 또하나는 글로벌리즘이다. 남북한이 냉전 시기에 축구를 통해서 하고 싶었던 것의 중요한 하나는 외교였다. 중동 지역을 놓고 경쟁하기도 했고, 북한은 스웨덴 덴마크 등 북구 국가들과 수교하기전에 축구 친선경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잡았다. 가장 세계화된 스포츠인 축구를 통해 남북한은 냉전 시절 외교에서 중요한 일을 했다. 세번째는 앞서도 많이 언급했던 남북한 축구의 후원자들을 밝히고 싶었다. 마지막으로는 남북한을 통칭한 코리아만의 축구 스타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1966년 북한과 2002년 한국이 보여줬던 축구는 물론 세련미에서는 큰 차이가 있지만 축구철학적인 면에서는 비슷한 것이 많다. 많이 뛰고, 수비를 강화하면서 공을 끊고 빠르게 역습하는 부분이 비슷하다. 세부적인 전술에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1966년의 북한팀을 보면서 영국 언론이 ‘이 팀은 90분이 아니라 180분도 이렇게 뛸 것같은 팀’이라고 평가했지만 2002년의 한국팀도 엇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두 팀은 또 상당히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했다. 압도적으로 전력이 우세해서 공격을 잘했다기 보다는 한번 리듬을 타면 활화산같은 공격을 계속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류가 2002월드컵때의 한국팀을 분석하면서 그 스타일을 ‘특공육탄전을 하는 것같다’고 표현 한 적이 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을 상대했던 조선팀이 그러 했을 것이다. 남북한 축구는 이념도 다르고,후원자도 달랐지만 그러면서 제로섬같은 경쟁을 계속해왔지만 한국이 나가야할 모델은 1966년의 북한 모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해본다. 코리아형 축구스타일을 민족동질성의 한 축으로 볼 수 있다는게 이 책의 결론이다.

-책은 2002년까지를 다루고 있지만 이후에도 벌써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이후의 보론을 한번 펼쳐본다면.

2002년의 4강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 이상의 성과가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의 원정 16강이라고 판단한다. 남아공월드컵에서 2002년의 유산이 마지막으로 폭발했다. 북한도 마침 그 대회에서 1966년 이후 처음으로 월드컵에 나왔다. 당시 북한팀에는 해외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도 있고, 정대세처럼 북한을 국적으로 선택해 나온 ‘자이니치’들도 있었다. 정치 외교까지 연결하는 것은 조금 오버일지 모르지만 북한이 앞으로 잘하기 위해서는 국제화된 모델로 나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축구는 그런 면에서 매우 소중한 기제이다. 북한이 국제무대로 나오려고 할 때,또는 우리와 교류를 하려고 할 때 축구가 가장 부드럽게 양쪽을 연결시켜 줄 수 있다. 우리쪽에서 접근하기에도 그렇고, 그쪽에서 받아들이기에도 그렇다. 북한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종목은 농구나 레슬링이 아니라 축구일 수밖에 없다는 개인적인 믿음이 있다. 북한은 과거가 더 좋았던 나라이고, 축구는 어느 면에서 그런 시절을 상징한다. 평양이 갖고 있는 축구도시로서의 전통도 있다. 이런 부분을 우리가 (효율적으로)터치하면서 접근한다면 지속적인 남북한간의 교류는 축구를 통해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이런 책이 영어로만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 번역 계획은 없는가.

이 책을 그냥 번역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나도 영어로 책을 썼지만 당연히 완벽하지 않다. 한계가 있었다. 수많은 한글 사료들을 이용해 좀더 맛깔나게 쓰고 싶다. 스포츠서적은 학술서와 대중서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분야다. 앞으로 자료도 보강해서 번역이라기 보다는 우리 말로 재창작 내지 재집필하고 싶은 욕심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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