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이 박용택
박한이(왼쪽)와 박용택이 지난 10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삼성-LG 경기에 앞서 스포츠서울 33주년 인터뷰를 위해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고 있다. 대구 | 윤세호기자 bng7@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윤세호기자] 스포츠서울이 창간 33주년을 맞아 33번을 달고 있는 KBO리그의 전설 두 명을 만나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대학시절부터 대표팀에서 인연을 이어온 프로 17년차 삼성 박한이(39)와 LG 박용택(39)은 33번에 대한 에피소드, 자신도 모르게 맞았던 리빌딩 위기 등 전설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과정을 하나씩 풀어놨다.

박한이와 박용택 모두 KBO리그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일까지 박한이는 통산 2032경기에 출장해 2100안타, 박용택은 2015경기에 출장해 2317안타를 기록 중이다. 박한이는 KBO리그 역사에서 단 둘 뿐인 16시즌 연속 세 자릿수 안타를 달성했다. 프로 입단 3년차에 최다 안타 타이틀을 거머쥔 그는 두 차례 외야수 골든글러브, 득점왕,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 MVP 등을 수상하며 성공가도를 달려왔다. 박용택은 많은 부분에서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KBO리그에서 유일한 6시즌 연속 150안타 이상 달성자다. 2000경기 출장과 200홈런, 300도루를 모두 기록한 선수도 박용택이 유일하다. 무엇보다 박용택은 양준혁의 역대 최다 기록(2318안타)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올시즌에도 3할 타율을 기록한다면 양준혁과 장성호도 달성하지 못했던 10시즌 연속 3할 타율이라는 또다른 금자탑을 세운다. 박한이와 박용택은 예전부터 꾸준히 달아온 등번호 33번이 자신들에게 행운을 준 것 같다고 웃었다.

- 두 선수 모두 아마추어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33번을 단 것으로 알고 있다. 등번호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나?박한이(이하 한):

대학교부터 33번을 좋아해서 달았다. 개인적으로 숫자 3을 좋아한다. 자기에게 맞는 번호라는 게 있는데 나는 내게 맞는 번호가 33번 같았다. 프로 1년차부터 33번 달고 싶었지만 이정호 선수가 33번을 단다고 해서 처음에는 32번을 달았다. 그러다가 2년차부터 33번을 다시 달았다. 내게는 좋은 번호 같다. 33번을 달고는 큰 부상도 당하지 않았다. 프로에서 오래 뛸 수 있었던데는 33번을 단 운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박용택(이하 택):

초등학교에서 처음 야구를 시작할 때 하도 말라서 감독님이 꽉찬 번호를 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33번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33번을 계속 달고 있다. 사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프로에서도 계속 33번을 달 수 있게 돼 내가 운이 좋은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팀에서 내가 들어올 때마다 33번을 비워줬더라. 계속 33번을 달면서 33번이 좋아졌다. 1990년 6월 3일 초등학생 박용택이 33번을 달고 첫 야구 경기를 뛰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3이란 숫자가 야구에서 나름 의미가 있기도 하더라. 이제는 내 번호라는 의식이 강하다. 인연도 깊고 애정도 있다.

- 프로에서 17년이라는 긴 세월을 쉬지 않고 달려왔다. 대기록을 꾸준히 경신하고 있는데 지금 시점에서 프로생활을 돌아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한:

프로에 입단하자마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다. 마치 세뇌를 당한 듯 17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렸다. 열심히, 잘 해야 한다는 생각만 해왔다. 그런데 나중에 고참이 되니까 너무 앞만 보고 왔다는 것에 대한 후회가 생기더라. 그동안 뒤를 돌아볼 시간을 갖지 못했다. 야구에 대한 개념, 발전 방향 등을 등한시 하지 않았나 싶다. 변화가 너무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강하다. 나름대로 타격폼에 변화를 줬지만 변화도 한정된 틀 안에서 이뤄졌다. 변화를 좀 더 과감하게 시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좀 뒤를 돌아보게 된다.

택:

한이형은 프로에 오자마자 잘하지 않았나. 2, 3년차에 리그에서 가장 안타도 많이 치고 골든글러브도 받았다.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자리를 꿰찬 안정적인 타자였다. 반면 나는 프로 입단 후 꽤 긴 시간동안 미완성 타자였다. 그래서 어릴적부터 이런저련 변화를 줬다. 그러다보니 변화가 두렵고 어렵지는 않은 것 같다. 워낙 변화를 많이 꾀했으니까. 아마 프로 1, 2년차부터 쭉 들여다보면 내 타격폼이 계속 바뀐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타격에 완벽은 없다. 그래도 예전에는 내 자신이 너무나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나마 2009년부터 내가 어떤 타자인지, 어떻게 안타를 쳐야하는 타자인지 알게 됐다. 지도자 중 요즘 어린 선수들이 이런저런 영상 자료를 접하면서 너무 변화를 많이 꾀한다고 부정적으로 보시는 분도 계신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달랐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다르다. 몸상태, 기분, 컨디션 모두 하루하루 바뀐다. 개인적으로 가장 금기시하는 게 타격 컨디션이 좋았을 때의 영상을 보는 것이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여러가지로 달라져 있다. 어릴적에는 경기 전 타격훈련에서 잘 맞는데 실제 경기에 들어가면 안 맞는 경우도 있었고 그 반대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훈련에서의 모습이 70, 80% 정도는 경기로 이어진다. 내게 타격훈련은 훈련이 아니라 체크다. 어디가 안 좋은지 체크하고 체크한 내 컨디션에 맞춰서 경기를 치른다.

- 변화를 두고 걸어온 길에는 차이가 있지만 2000개가 넘는 무수히 많은 안타를 꾸준히 기록하고 있는 것은 공통점이다. 많은 안타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안타가 있나?한:

정규시즌보다는 한국시리즈(KS) 같은 큰 무대에서 친 안타가 기억에 남는다. 특히 2014 넥센과의 KS에서 한현희를 상대로 터뜨렸던 홈런, MVP를 받았던 2013년 두산과 KS에서 때렸던 안타가 지금도 생생하다. 시리즈 전체가 지금도 뚜렷하게 떠오른다. 당시 우리가 4차전까지 1승 3패로 크게 밀리고 있었다. 그래도 반전 기회가 한 번은 찾아온다고 믿었고 그 한 번만 잡으면 승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다짐했다. 5차전에 앞서 먼저 2승 3패를 만들자고 선수들끼리 얘기했는데 5차전을 이겼고 6차전에 대구로 돌아와 더스틴 니퍼트(현 KT)를 만나게 됐다. 우리가 늘 니퍼트에게 고전했지만 그때는 니퍼트만 공략하면 무조건 우승한다는 믿음이 강했다. 니퍼트를 공략했고 우리가 믿은 대로 7차전에서 우승을 했다. KS에서 확률적인 분석은 의미가 없다. 그것보다는 흐름과 포인트를 잡는 게 중요하다.

택:

가장 기억에 남는 안타는 프로 첫 안타다. 신인이었던 2002시즌 1군이 9경기를 치른 시점에서 2군에서 1군으로 올라왔다. 당시 우리 성적이 2승 7패로 안 좋았을 것이다. 아무리 신인이라고 해도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한 게 이해가 안 됐다. 스프링캠프부터 타격감이 좋았는데 시범경기도 못해봤다. 1군 데뷔전은 문학 SK전이었는데 첫 경기에서 2루타 포함 2안타, 두 번째 경기에선 홈럼 포한 2안타를 기록한 게 생생히 기억난다. 프로에서 뛰면서 기록과 관련된 안타나 끝내기 안타 같은 게 기억이 난다. 올시즌에는 정말 짜릿한 안타가 많지 않다. 앞으로 짜릿하고 기억에 남는 안타를 많이 만들고 싶다.

- 17년 동안 수많은 명장면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동안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긴 시간 한 팀 유니폼만 입는 ‘원클럽맨’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연차가 쌓이면 리빌딩 대상이 되기도 한다.한:

2008시즌이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플래툰으로 경기를 나간 적이 있었다. 팀 내부적으로 리빌딩을 통해 야수진에 변화가 컸던 시기였다. 당시 나이가 많은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 당황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다시 주전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플래툰이지만 나가는 경기마다 안타를 치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방법 밖에 없다고 다짐했다. 내부경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도 강했다. 결국 그 때 플래툰을 이겨내면서 더 좋은 선수가 되지 않았나 싶다. 경쟁을 극복하기 위해선 자신감이 중요하다. 지금도 자신감은 여전하다.

택:

막 야구에 눈을 떴던 2010년. 나이 서른 두 살 주장을 맡았을 때 리빌딩 대상이 됐다. 나부터 위로 모두 리빌딩 대상이었다. 이진영과 정성훈도 포함됐다. 구단은 이택근을 중심으로 새 판을 짜려고 했다. 외부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구단이 이런 방향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게 아주 큰 자극이 됐다. 오기도 생겼다. 베테랑 선수들이 다 그랬다. 4, 5년 전 LG의 젊은 선수들이 선배들의 기에 눌렸다는 얘기가 있지 않았나. 당시부터 베테랑들은 더 독기를 갖고 야구를 했다. 지금도 당시 구단이 내린 결정을 이해할 수 없지만 덕분에 좋은 기록들을 세우고 꾸준한 야구선수가 되기는 했다.

- 그런 시기를 이겨내고 FA(프리에이전트)가 됐을 때 고민도 컸을 것 같다.한:

돈 욕심을 안 냈기 때문에 이렇게 삼성 원클럽맨이 된 게 아닐까 싶다. 옛날에는 원클럽맨의 중요성을 몰랐다. 이제는 자부심을 느낀다. 사실 FA가 되고 흔들렸던 순간이 있었다. 용택이도 그랬을 것이다. 정말 고민이 컸는데 다른 팀에 가서 적응하고 새로운 후배들에게 인사 받는 게 부담스러웠다. 다시 삼성을 선택했을 때는 후회도 조금 했는데 지금은 내 선택이 맞았다고 확신한다. 삼성 원클럽맨이라는 말도 들어보고 한 팀에서 기록도 많이 세웠다.

택:

나도 두 번째 FA가 됐던 2014년 겨울이 고비였다. 당시 4년 계약을 하면 계약 기간 안에 2318안타를 깰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600개가 좀 넘게 남았는데 열심히 하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런데 구단은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 구단 측에서 4년 계약을 주저했다. 당시 단장님께서 내가 계약 3년차 후반기부터는 고전할 것 같다고 하셨다. 그래도 다행히 어떻게 4년 계약을 했고 지금 이렇게 보여주고 있다.

DSC_0019 2
지난 10일 삼성 박한이(왼쪽)과 LG 박용택이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스포츠서울 33주년을 기념하는 인터뷰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 윤세호기자 bng7@sportsseoul.com
-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는 게 신기하고 놀랍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서로 궁금한 점이나 에피소드 같은 게 있나?한:

나는 용택이가 얼마나 더 야구하면서 얼마나 더 대단한 기록을 세울지 궁금하다.

택:

3000안타를 치면 더 하라고 해도 할 자신이 없을 것 같다. 기록을 쫓다보면 몸이 아닌 정신이 먼저 지치게 된다. 50세까지 야구를 할 수 있는 몸을 유지할 자신이 있다. 그런데 만일 3000안타를 치는 날이 온다면 이후 또 어떻게 정신적으로 무장을 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2318안타를 바라보면서도 정신적으로 힘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더 강하게 3000안타를 가슴 속에 품고 있다. 사실 3000안타 전에 우승해야 한다. 무조건 우승해야 한다. 우승을 하지 못한다면 3000안타가 아니라 5000안타를 칠 때까지 유니폼을 벗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

우승은 정말 좋다. 하면 할 수록 더하고 싶고 언제 해도 좋은 게 우승이다. 지금 내 목표도 후배들과 함께 KS에 나가는 것이다. 포스트시즌 무대가 주는 긴장감과 우승했을 때의 쾌감 등을 후배들이 느끼게 하고 싶다.

택:

7번이나 우승한 한이 형이 정말 부럽다. 한이 형도 몸관리 잘해서 오랫동안 함께 야구하고 싶다. 할 수 있을 때까지 오래오래 함께 즐기고 싶다. 따로 만나서 식사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한이 형과는 마음으로 가까운 사이다. 한이 형 경기도 챙겨보고 관심도 갖는다. 항상 아프지 않고 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

용택이를 대학생 때 알았는데 그 때부터 우리가 만나는 게 쉽지가 않았다. 용택이는 대학생 때 속초에서 숙소 생활을 했고 나는 서울에 있었다. 만날 일은 대표팀과 프로에서 맞대결 할 때 정도다. 특별한 추억은 없지만 함께 야구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지금 나는 삼성에서 ‘왕고(왕고참)’, 용택이는 LG에서 ‘왕고’다. 우리 모두 세월이 야속하다고 느끼면서도 더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야구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 만으로도 통하는 사이가 됐다.

- 마지막으로 스포츠서울이 33주년을 맞이했다. 오랫동안 야구선수를 하면서 스포츠서울과 관련된 추억이 있나?한:

우승하고 1면에 나올 때 정말 기분이 좋다. 예전에는 신문도 많이 보고 스크랩도 했었다. 그리고 우승 후 1면에 그 장면이 나오면 진짜 흐뭇하더라. 가판대에 우승기사로 도배된 신문이 잔뜩 쌓여있을 때 ‘우리가 정말 우승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지었던 게 기억난다.

택:

프로에 입단한 후 부모님께서 스포츠신문을 다 보셨다. 다 구독하시면서 내 기사들을 꾸준히 스크랩하셨던 게 기억 난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지 아마추어 때 기사도 스크랩한 게 많이 남아 있다. 나는 앞으로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 나도 우승하고 신문 1면에 나가고 싶다. 나는 우승하면 정말 신나게 울 자신이 있다. 우승하고 우는 장면이 1면으로 쓰기에 더없이 좋을 것이다.

bng7@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