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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김효원기자]종이 위에 검은 이미지들이 소용돌이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폭풍같던 이미지 속에 사람, 자동차, 나무, 개, 텐트, 자전거같은 형태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특별한 날의 내러티브가 담겨있는 듯 함의적이다.
임선구 작가가 최근 4년간의 연필 드로잉을 선보이는 개인전 ‘종이 위의 검은 모래’전(~28일, 갤러리조선)이다.
삶에서 건져올린 오래된 기억과 오늘의 경험이 마주하는 순간을 드로잉으로 담아내고 있는 임선구는 이번 전시에서는 연필 드로잉을 비롯해 콜라주, 드로잉북 등을 선보였다.
임선구 작가는 “나는 오래된 기억들을 바탕으로 나의 의식 깊은 곳에 숨어있는 감정의 모양을 그려나간다. 산의 모퉁이를 돌아 나에게 전해진 이야기들, 창고 같은 집에 굴러다니던 낡은 책의 이름들, 사라졌다가 생겨나기를 반복하는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린다”고 밝혔다.
연필과 종이를 재료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나의 내면에 자리 잡은 기억들이 연필을 깎으며 굵직하게 떨어지는 나무 껍데기들과 흑연가루 같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그리기 위해 깎아내고 사라지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책상 아래에 켜켜이 쌓여 나의 그림 위로 돌아온다. 연필의 흑연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 주변을 맴도는 기억들과 필연적으로 엉키게 되었다. 나아가 흑연과 다른 재료를 혼합하고 종이의 질감을 바꿔나가면서 나는 더 먼 곳의 기억과 앞으로 마주칠 또 다른 세계를 탐험하고자 한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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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기획한 독립큐레이터 천미림씨는 이같은 임선구의 드로잉에 대해 ‘깊이 숨겨둔 서로의 의식 사이로 관통하는 하나의 길을 찾는 방법’이라고 해석했다.
천미림씨는 “임선구의 이미지들은 기억의 파편들로부터 출발한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이후 왜곡된 기억을 재조합하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빈틈에 환상을 채워 하나의 구성적 내러티브를 형성한다. 작가는 의식의 깊은 우물에서 건져 올린 기억의 덩어리들-그 축축하고 질척한 사건들을 뭉치고 뒤집은 뒤 보기 좋은 허구들을 섞어 하나의 아름다운 형상으로 조형한다. 작가는 작업에서 연민과 증오, 분노와 모순이 뒤엉킨 일그러진 감정들에 환상을 덧입혀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는 아마도 깊이 숨겨둔 서로의 의식 사이로 관통하는 하나의 길을 찾기 위함이다”라고 풀이했다.
‘이상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우리는 검은 산의 귀퉁이에 모여’, ‘나만 모르는 매일 보는 곳’ 등 작품제목이 환상과 내러티브를 강조한다. 작가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한 드로잉이지만 결국 인간 보편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있는 임선구의 드로잉은 오래 곁에 두고 펼쳐보고 싶은 ‘어른을 위한 동화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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