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박경수, 목발 짚고 우승 축하
KT 박경수가 유한준과 함께 18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21 KBO리그 두산과 KT의 한국시리즈 4차전 후 마운드로 걸어나가고 있다.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 장강훈기자] “몰래 카메라였어요.”

KT 강백호(22)의 깜짝 고백(?)에 박경수(37)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강백호는 “주장인 (황)재균 선배님이 제안을 하셨는데, 누구랄 것 없이 ‘우승 순간 마운드에 모이자’는 데 의견 일치가 됐다”고 말했다. 박경수가 “(유)한준이 형도 알고 있었느냐”고 묻자 “아마, 모르셨을 것”이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대급’ 감동 세리머니로 불린 KT의 창단 첫 우승 뒷얘기다.

박경수-강백호
KT 박경수(왼쪽)와 강백호가 스포츠서울 신년특집 인터뷰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웃고 있다. 박진업기자 upandup@sportsseoul.com

◇박경수는 그라운드로 나가기 싫었다?

지난 11월 18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는 잔잔한 감동이 연출됐다. 창단 8년 만에 통합우승을 차지한 KT 선수단은 우승 감격을 누리다 말곤 마운드 앞에 도열해 1루 더그아웃을 향해 손짓했다. 전날 햄스트링 파열상으로 쓰러진 박경수와 생애 첫 통합우승 환희 속 은퇴를 결심한 유한준(41)을 향한 손짓이다. 목발을 짚은 박경수와 그를 부축한 유한준이 천천히 그라운드로 나서는 장면은 우승팀의 품격을 대변해 뭉클한 감동을 안겼다. KBO리그의 10번째 심장이자 막내 구단이 진정한 ‘원팀’으로 통합우승을 따냈다는 것을 증명한 장면이기도 했다.

박경수는 “생각보다 빨리 우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팀 분위기가 그랬다. 4차전을 앞두고 더그아웃에 도착해 ‘오늘 확정하면, 나 신경쓰지 말고 마음껏 우승 환희를 즐기라’고 후배들에게 얘기했다. (강)백호가 1루를 밟고 우승을 결정했을 때 한준이 형과 부둥켜안고 울었다. 선수들이 마운드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최대한 천천히 나가야겠다. 환희를 만끽하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 싫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후배들은 좋아하다 말고 자신을 향해 ‘빨리 나오라’고 거듭 손짓을 했다. 박경수는 “얘들이 왜 이러나 싶었다”며 웃었다.

박경수-강백호
KT 박경수(왼쪽)와 강백호가 스포츠서울 신년특집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박진업기자 upandup@sportsseoul.com

◇뛰는 경수 위 나는 백호 “사실은…”

이 얘기를 듣던 강백호는 “미리 쓴 시나리오였다”며 “그림이 그렇게 예쁘게 나올줄은 몰랐다. 그래도 선배님들과 같이 우승 기쁨을 누려야 한다는 선수들의 생각은 (박)경수 선배님이 쓰러진 직후부터 이미 통했다. 돔구장이라서 선배님들의 뒷모습이 더 감동적으로 연출된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선배님들의 헌신과 희생이 없었다면, 통합우승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분위기를 다잡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후배들 입장에서는 선배님들을 빼고 우승 감격을 누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박경수도 “정말 좋은 후배들을 만나 말년에 복을 받고 있다”며 “(강)백호 얘기를 듣는데 온몸의 털이 섰다. 돌아보면, 공교롭게도 내가 3차전에서 다쳤고 우승확정 순간 내 옆에 한준이 형이 있었다. 드라마를 쓰려해도 이렇게는 못쓸 것 같다. 모든 순간이 소름 돋을 만큼 감동적”이라며 웃었다.

디펜딩 챔피언 KT의 힘을 단적으로 드러낸 얘기다. 베테랑이 끌고 젊은 선수가 미는 이상적인 구도가 형성돼 KT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어 냈다. 특히 정규시즌 우승 트로피를 내줄 위기에 처한 10월에는 베테랑들의 힘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후배들의 증언이다. KT는 10월 26경기에서 단 8승(4무 13패)를 따내는 데 그쳤다. 9월까지 3.5경기 차 단독선두에서 승차없이 타이브레이크 게임을 치르는 신세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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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박경수(왼쪽)와 강백호가 스포츠서울 신년특집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진업기자 upandup@sportsseoul.com

◇완벽한 신구조화 동력은 ‘허슬’

강백호는 “선수들이 많이 지친 상태였다. 목표가 눈앞에 있는데 자꾸 패하다보니 자신감도 떨어졌다. 마음은 조급한데 결과를 못내니 더 답답했다”고 돌아봤다. 이때 박경수 유한준 황재균 등 베테랑들이 몸을 던져 분위기를 띄웠다. 강백호는 “(박)경수 선배님은 다이빙 캐치로 공을 걷어내고, (유)한준 선배님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승리에 대한 집념을 보여주셨다. 선배님들의 허슬플레이를 보며 뭔가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경수 선배님 나이 때 저런 플레이를 할 수 있을까를 계속 생각했다. 선배님들이 몸을 던지는 장면은 정말 만화 같았다”고 말했다. 삼성과 타이브레이크 게임을 승리로 이끌어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한 동력은 단연 선배님들의 허슬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박경수는 “옆에서 보면 미친놈이라고 했을 것”이라며 “분위기가 처지는 게 보이는데 선배들까지 처지면 안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젊은 선수들이 끌어가는 팀이라 분위기가 한번 처지면 회복하기 어렵다. 그래서 진짜 미친놈처럼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웃거나 실없는 농담으로 긴장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고 돌아봤다. 그는 “경기에서 패한 뒤 버스를 타면 순위경쟁 팀을 응원하기까지 했다. 우리가 지면 삼성도 지더라. 그래서 ‘우리만 진 게 아냐. 아직 1등하고 있어. 다른 팀 선수들도 지쳤으니까 이 상황을 즐기자’고 큰 소리로 얘기했다”며 “젊은 선수들의 활약 덕분에 우승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왔으니, 후배들이 힘들 때 선배들이 힘을 보태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끈끈한 조직력을 구축한 비결은 개성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든 덕분이다. 물론 자유로운 분위기에도 지켜야 할 규칙은 있다. 박경수는 “소극적인 플레이를 하다가 실책을 하거나 실수를 하면 단호하게 혼냈다”고 말했다. 팀 모토를 ‘신나게 플레이하기’로 정한만큼 결과를 예측하기보다 매 순간 온 힘을 다해 임하라는 게 유일한 규칙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기꺼이 몸을 던질 수 있는 베테랑의 집념도 이런 모토와 궤를 같이한다. 강백호는 나는 팀의 희생을 등에 업고 짧은 시간에 프로에 적응해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신인 때부터 계속 기회를 받았는데, 동료들이 배려하지 않았다면 받지 못했을 기회”라며 “선배들이 마음껏 까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셔서 평생 한 번도 못할 수 있는 우승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시너지효과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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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박경수(왼쪽)와 강백호가 스포츠서울 신년특집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진업기자 upandup@sportsseoul.com

◇창단 첫 우승 결코 우연이 아니다

챔피언에 등극했지만 지켜야 한다는 부담과 맞서야 한다. 내년에는 더 강한 견제를 받을 게 뻔하다. 강백호는 “챔피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자부심이 자만심으로 변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젊은 선수가 많은 팀이지만, 올해 큰 경기 경험을 많이 쌓았다. 이제는 이기는 팀이 됐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박경수 역시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개인적으로는 한준이 형이 준 ‘팀 KT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목표다. 선배들이 먼저 뛰면 후배들을 따라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창단 첫 우승을 다른 구장에서 해 홈팬과 함께 감격을 누리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내년에는 수원에서 팬과 함께 우승 감격을 누리고 싶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프리에이전트(FA)로 박병호(35)를 품에 안아 장타 갈증을 풀어낸만큼 KT는 통합우승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박경수가 선봉에 서고 강백호가 뒤를 받치는 마법사 군단의 신구조화는 임인년(壬寅年)에도 계속된다. 박경수와 강백호는 “올해는 코로나가 멀리 물러나 수원구장이 홈팬으로 가득 차기를 기원한다. 팬 여러분들의 응원과 사랑 덕분에 창단 첫 통합우승 영광을 누렸기 때문에 올해는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한 발 더 뛰겠다. 더 큰 사랑과 응원 해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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