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선더베이(캐나다)=황혜정기자] “내 청춘(靑春)을 너희와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두 명의 베테랑 국가대표가 정든 태극마크를 내려놓는다. 대한민국 여자야구 국가대표팀 외야수 신누리(36)는 대표팀 은퇴를 일찌감치 선언했고, 투수 김보미(34)는 태극마크 반납을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신누리는 2017년부터, 김보미는 2015년부터 태극마크를 달았다. 각각 7년, 9년 간 조용하게 국가를 대표해 뛰었다. 조용하고 남모른 헌신이었다.

김보미는 지난 9년의 세월을 돌아보며 “나도 고생했고, 너희도 고생했다. 이렇게 같이 버텨줘서 고맙다. 나 혼자 노력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다. 같이 버텨왔다.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내 청춘을 이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며 함께 대표팀 생활을 함께했던 모든 동료에 고개를 숙였다.

신누리도 “지난 7년간 (김)보미를 비롯해, (이)빛나, (김)해리 등이 함께 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다. 대표팀 생활을 함께한 이 친구들이 있었기에 나도 더 열심히 하고, 버틸 수 있었다. 내년에도 이 친구들과 대표팀에 함께 선발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무 고맙다”고 감사를 전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국제대회. 지난 14일(한국시간) 캐나다 선더베이에서 열린 세계야구소프트볼협회(WBSC) 주관 ‘2024 여자야구 월드컵’ 예선 마지막 경기인 캐나다전에서 투수 김보미가 선발 등판했다.

김보미는 등판 전 “후회 없이 던지고 오겠다”고 했다. 마운드에 선 그의 표정에선 결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2.1이닝 3자책을 기록한 그는 캐나다 강타선을 상대로 삼진을 3개 솎아내며 역투했다.

이날 백미는 투수 교체를 위해 마운드에 오른 대표팀 양상문 감독에 김보미가 모자를 벗더니 꾸벅 인사한 장면. 김보미는 양 감독이 공을 들고 마운드에 오르자 먼저 내·외야 선수들에 박수를 보내며 고마움을 전한 뒤, 모자를 벗어 양 감독에 정중히 인사하며 감사함을 표했다. 보는 이의 눈시울이 붉어진 순간이었다.

신누리도 마찬가지. 그는 자신의 마지막 국제대회에서 투혼을 불살랐다. 첫 경기인 홍콩전 2사 만루 상황에서 ‘싹쓸이’ 3타점 우전 3루타를 친 것에 이어 호주전에선 2루와 3루로 몸을 날려 슬라이딩해 진루하는 데 성공했다. 신누리의 이번 대회 성적은 타율 0.273(11타수 3안타) 3타점. OPS(출루율+장타율)는 0.884로 대표팀 1위에 올랐다.

신누리는 “이번 대회 팀 성적이 좋지 않아서(5전 전패) 사실 마음이 많이 무겁다. 팀 경기력이 생각 보다 나오지 않아서 너무 아쉽다. 아직도 내가 (역전패 한) 홍콩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저 많이 아쉬울 뿐”이라고 털어놨다.

신누리는 대표팀 생활을 돌아보며 주전 외야수로 우뚝 올라선 2018년도가 가장 기억 남는다고 꼽았다. 그는 “2017년 땐 후보 선수라 두 타석밖에 못 나섰는데,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린 ‘여자야구 월드컵’에선 풀타임 주전으로 나섰다. 그때 쾌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올해 여자야구 대표팀 20명 중 최선참으로 대회를 준비했다. 동생들은 입을 모아 “누리 언니가 장난도 많이 치고 먼저 다가와 준다. 분위기를 항상 좋게 만들어준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신누리는 나이가 20살 차이 나는 막내 선수들과도 격의 없이 지낸다. 신누리가 있어 선수들이 하나가 돼 똘똘 뭉쳐 세계대회까지 나갈 수 있었다.

태극마크를 내려놓으면 주말이 허전하지는 않을까. 신누리와 김보미는 “주말에는 소속팀 훈련을 가야 해서”라고 웃으면서도 “2월 말부터 항상 대표팀 선발전부터 훈련 시작할 준비를 해왔는데 이제는 안 하게 될 예정이니 그때 많이 허전할 것 같다”고 했다.

많은 이들이 여자야구 국가대표를 오래하는 이들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 명예도, 보상도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누리는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가 좋아서 지금까지 한 거다. 좋아하면 무엇을 못 하겠나.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무엇을 못 할까’ 하는 것과 같다”며 담담하게 이유를 말했다.

김보미도 “나도 ‘야구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였다. 그런데 대표팀을 오래 할수록 생각의 폭이 조금 넓어지더라. 조금이라도 여자야구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인터뷰도 적극적으로 응하고 내 경험을 어린 선수들에게도 나눠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중학교 체육교사인 김보미는 “내 기사를 보고 내 제자 중에서 누군가가 어느 날 ‘선생님, 저 야구 시작했어요’ 한다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오랜 시간 누군가가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를 위해 뛰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조용하고 외로운 싸움이었을 터. 그럼에도 서로 의지하고 다독이며 지금껏 달려왔다. 그동안 친구는 많이 잃었지만, 든든한 ‘야구인’ 친구는 한가득 얻었다고.

대표팀의 중심이었던 두 사람이 정든 태극마크를 내려놓는다. 그래도 걱정은 없다고. 재능 많고 열정 넘치는 젊은 후배들이 이제 대표팀의 중심이 돼 활약할 터이니. et16@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