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10.26 대통령 시해 사건은 전두광(황정민 분)에게 기회가 됐다. 일개 군인에 불과해 권력 서열에서 멀리 있었던 보안사령관 전두광은 계엄사령관 정상호(이성민 분)에 이어 대한민국 권력 서열 2위에 올랐다.
권력을 탐닉했던 전두광은 이 기회를 어떻게든 살리려 한다. 군내 사조직 하나회 리더이자, 박 전 대통령을 죽인 김동규를 심문할 수 있는 특별한 임무를 맡았으며, 주요 기관 감청도 가능했던 터라 사실상 모든 정보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언론과 방송도 그의 입을 주목했다. 권력 서열은 2위지만, 여러 면에서 1위보다 힘이 강했다.
전두광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정상호는 서울을 지키는 수도방위사령관에 이태신(정우성 분)을 배치한다. 하나회와 사이가 좋지 않고 충직하면서도 스마트한 군인이며, 하나회가 반란을 일으킬 때 막을 수 있는 충신은 이태신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10.26의 충격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던 12월 13일, 대한민국은 시스템대로 인사조직 재편을 앞두고 있다. 군 조직도 싹 다 재편될 예정이다. 정상호는 하나회 주요 인물을 좌천시킬 계획이다. 전두광, 노태건(박해준 분) 등 모두 지방으로 편제될 계획이었다.
그 발표가 있기 하루 전 12월 12일, 전두광, 노태건(박해준 분)을 비롯한 하나회 인물들이 반란을 준비한다. 정상호를 납치한 뒤 서울에 공수부대를 배치하려고 한다. 이태신과 정병주(정만식 분) 특전사령관, 김준엽(김성균 분) 헌병감 등 몇 안 되는 충직한 군인들이 반란군을 진압하려 한다.
오는 22일 개봉하는 ‘서울의 봄’은 대한민국 역사의 운명을 바꾼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재조명한 작품이다. 이미 수많은 시사 프로그램에서 다뤄졌고, 여전히 정치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김성수 감독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던 이 소재를 꺼내 역사의 물길을 되돌린다.
일반적으로 12.12 군사 반란은 전두환의 스토리로 펼쳐져 왔다. 하나회 리더로서 사실상 개인의 욕망으로 기획된 쿠데타이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전두광과 이태신의 1:1 구도를 만든다. 권력을 훔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대결이다. 이미 결과가 나온 역사지만, 스포츠 중계를 하듯 엎치락 뒤치락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이 전달된다.
전두광이 된 황정민은 마치 조커의 옷을 입은 듯 활개친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거침없이 판단하고 내달리는 가운데서 여유를 잃지 않는다. 개인의 영달을 대의인 양 포장한다. 힘을 줘야할 때와 빼야할 때를 정확히 안다. 탐욕에 빠진 인물에 묘한 색채를 부여한다. 좋은 연기를 펼쳐왔던 황정민의 역대급 얼굴이 ‘서울의 봄’에서 나온다.
정우성의 연기는 묵직하다. 철저히 감정을 억제하며 욕망에 미친 군인들과 대적한다. 절제된 표현으로 중심을 잡는다. 끝까지 나라를 지키려 했던 이태신의 신념 덕분에 반란군이 반란군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정의를 표현한 인물이 정우성이라는 게 고맙다.
두 사람 외에도 김성균, 이성민, 정만식, 박해준을 비롯해 안내상, 김의성, 유성주, 박훈, 이재윤, 남윤호 등 모든 출연 배우가 힘을 발휘한다. 매우 짧은 분량임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준혁, 정해인도 명확하게 굵은 점을 찍는다. 작은 배역의 배우조차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런닝타임이 무려 140분인데, 조금도 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관객이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고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된다. 배우들이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 시작과 동시에 몰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악인의 승리가 달갑지는 않고 분노까지 치밀게 하지만, 그 감정이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소명으로 변화한다.
1979년 12월 12일 밤, 직접 총성을 들은 김성수 감독이 40년 넘게 가슴 속에 담았던 숙제를 풀어낸 작품이 ‘서울의 봄’이다. 이 영화를 명품으로 만들겠다는 연출가의 혼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워낙 예민한 소재를 다뤄 영화 외적인 논란이 예상되긴 하지만, 영화만 놓고 보면 올해 최고의 작품이라 부를 만한 퀄리티다. 누구와 봐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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