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한국당구의 어른이며 평생을 당구와 함께 보낸 강두석 선생의 일화는 말 그대로 전설이다. 해방이 되면서 한국당구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강두석 선생은 뛰어난 경기력을 자랑한 경기인 출신이다.
▶강문수 선수 부친 강두석 선생 명동에 당구장 경영
강두석 선생이 서울 명동에 운영한 당구클럽은 수많은 당구인들이 몰려드는 당구 명소였다. 김문장 양귀문을 비롯해 전국에서 ‘당구 좀 친다’는 선수들이 강두석 선생에게 당구를 배우기 위해 명동 당구장을 찾았다. 강두석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며 당구를 배운 2세대 선수들이 수두룩하다. 이들은 이후 한국당구의 절대적 인물로 성장하며 큰 활약을 펼친다.
한국당구의 어른 강두석 선생.
▶후배들을 남달리 사랑했던 강문수 선수
부전자전이었을까? 강두석 선생은 아들 강문수가 당구에 남다른 소질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를 선수로 키운다.
강문수 선수는 어린나이 때부터 부친을 이어 당구 선수로 활약했다. 지금은 대를 이은, 또는 커플 당구인들이 자연스럽지만 1980년대에는 당구계 정서상 흔치 않은 일이었다.
박수복 선생의 아들인 박대용도 부친을 따라 큐를 잡았다. 강문수와 박대용 이들 두 선수는 정통으로 당구를 배워서인지 일찍부터 한국당구의 상위랭커로 활약했다. 각종 대회에서 우승과 입상을 주고받으며 존재감을 키워 나갔다.
정상급 기량의 강문수 선수는 인성이 바르고 대인 관계가 좋았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를 예의 있는 착한 선수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의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았다.
강문수 선수는 특히 후배 선수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자질이 있어 보이는 후배들에게 조언를 아끼지 않았다. 그에게 당구를 배우려는 선수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체계적인 지도를 하며 지도자로서 자질도 보여 주었다.
▶이태리 5핀 한국대표로 출전
1988년 이태리에서 개최되는 세계5핀선수권대회에 강문수 선수가 한국 대표로 출전했다.
당시 한국은 3쿠션이 주 종목이었다. 1, 3핀은 일부 선수들이 내기당구로 치는 정도로 일반 동호인들에게는 생소했다. 강문수 선수는 기대와 달리 예선에서 탈락한다. 그는 “출전한 다른 나라 선수들의 경기력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한국선수들의 5핀 경기력은 초등학교 수준이다”라고 전했다.
국내에도 이전에 ‘핀 다우시’라는 종목의 경기를 해본 선수들이 적지 않았다. ‘핀 다우시’는 당구대 중앙에 핀을 세워놓고 3쿠션을 치면서 핀을 넘어뜨리는 방식의 경기로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종목이다. 하지만 1핀, 3핀 경기가 한때 반짝 유행을 하다가 곧 당구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강문수 선수 93-94한국당구최강전 4, 5, 6차대회 연속 우승
김문장 회장은 한국당구 최고의 기획자로, 강두석 선생의 기대가 컸던 인물이었다. 광산 일을 정리한 김문장 회장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당구였다. 하지만 한국당구경기연맹 참여가 기존 세력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그는 아예 다른 단체를 만들어 버린다. 바로 대한당구회다. 이후 대한당구회는 수많은 사업을 펼치며 전국통일을 하게 된다.
김문장 회장은 1990년 SBS와 한국당구최강전을 기획한다. 기존의 경기단체와 불협화음이 계속되자 최고의 경기력을 갖춘 선수들을 직접 지명해 출전시킨다. 1차전에 16명의 선수들이 선발됐는데 강문수 선수 역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서울삼풍백화점에서 열린 6차례 대회에서 1~3차전까지 성적이 좋지 않았던 강문수 선수는 이후 한국당구사상 기록적인 성적을 낸다. 4, 5, 6차전을 내리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지켜보던 관중들은 물론 당구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사건’을 저지른 것이다.
1985년 당구인의 밤에서 부친 강두석(왼쪽) 선생과 강문수 선수 .
▶당뇨 투병 끝 우리 곁을 떠나다
강문수 선수의 부친인 강두석 선생의 당구사랑은 당구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들 강문수 선수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강두석 선생도 항상 경기장에 있었다. 남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체육관의 최상단에서 강문수 선수의 경기를 지켜봤다. 거의 모든 대회를 빠지지 않고 관전하고 스승의 입장에서 격려와 조언으로 강문수 선수를 대했다.
하지만 후배들을 남달리 사랑했던 강문수 선수에게 신은 너무 가혹했다. 젊은 나이에 당뇨병을 앓게 된 것.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그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을 계속해야만 했고 당구도 계속 쳐야 했다. 언젠가 경기장에서 필자에게 인사를 하던 강문수 선수의 몸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그런 몸으로 대회에 출전해 경기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필자는 먹먹해진 가슴을 안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강문수 선수는 세상에 이별을 전했다.
▶한국당구 1세대 경기인 박수복 선생, 아들 박대용과 ‘당구 패밀리’
1916년생으로 한국 당구 시조격인 박수복 선생은 한국당구 1세대 경기인이다. 봉천에서 활동하다 해방이 되면서 귀국한다. 그의 당구지점은 1000점대로 당대 최고의 고점자였다.
일승정 당구 구락부에서 매니저로 활동하며 제1회 기술(예술구)당구대회, 제3회 전국당구대회 우승 등 한국당구 최고의 경기력을 갖춘 선수였다.
박수복 선생은 1959년 대한당구선수회의 필요성을 깨닫고 조직 구성에 나서 부회장을 맡았다. 이후 당구발전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1966년 대한빌리아드협회가 운영하던 대한빌리아드클럽의 사범에 이어 1969년 대한빌리아드협회 부회장으로, 또 제1회 한일친선당구대회 한국 선수단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가수 남인수가 을지로 3가에 서 운영하던 국제당구장에서도 사범으로 있으며 동호인들의 경기력 향상을 이끌었다.
박수복 선생의 아들 박대용 선수.
박수복 선생에 이어 아들 박대용도 당구 선수로 활약했다. 박대용 선수는 제2회 프로당구대회 사구와 3쿠션에서 우승을 할 정도로 1980년대 초 정상급 기량을 자랑한 전천후 선수였다. 사구, 예술구, 3쿠션 등 각 종목에서 잇달아 입상과 우승을 차지하며 존재감을 널리 알렸다. 하지만 대선수로 명성을 이어가던 무렵 항공화물 회사에 입사하면서 당구계를 떠난다. 현재는 기업인으로 사업에 열중하고 있지만 여전히 당구를 잊지 못해 다시 당구를 치기 위해 연습에 한창이다.
<박태호 당구연맹 수석 부회장> news@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