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1978년 신진 당구장에서 개최된 제 6회 한일친선당구대회에서 한국이 22승 12패 1무로 일본을 꺾는다. 이 대회에서 부산 출신 정상철 선수가 준우승을 차지하며 한국당구 1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부산에서 태어나 자란 정상철 선수는 타고난 자질보다는 대기만성형 선수였다. 당구는 정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실력을 키워야 되는 종목이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당구를 접한 정상철 선수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소질이 있었다.
▶최대 라이벌 이상천과 정상철
당구의 원칙을 깨달은 정상철 선수는 당구에 인생을 걸고 부단한 연습과 경기를 통해 실력을 쌓아 부산을 평정했다. 부산 지역은 일본과 가까워 당구가 성행한 도시였다. 그래서 유명선수들 중 부산 출신도 상당히 많다.
정상철 선수는 부산에서 인정을 받으며 활동을 했지만 더 큰 선수로 도약하기 위해 서울행을 결심한다. 강남의 반도 당구장에 여장을 풀고 서울의 유명선수들과 대결을 펼친 정상철 선수의 경기력은 남달랐다. 이를 눈여겨본 변기선(전 서울시 당구연맹 회장)씨가 자신의 집에서 지내며 연습을 하라고 제안해 정상철 선수의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상천과 쌍벽을 이뤘던 정상철 선수
▶대한당구회 출범으로 전국·사구·3쿠션·예술구 등 당구대회 봇물
1985년부터 1988년까지는 김문장 씨가 추진한 대한당구회가 출범하면서 대한당구협회와 함께 각종 당구대회를 많이 개최한 시기였다.
1987년 대한당구회 주최 예술구 타이틀매치에서는 김상윤 선수가 우승을 한다. 또 1988년 여의도 백화점에서 열린 대한당구회 프로당구대회에서는 3쿠션 박대용 선수, 사구 부문에서는 인천의 김정겸 선수가 각각 김평준 선수와 조창섭 선수를 이기고 우승을 차지한다.
김상윤 선수
같은 해 열린 대한당구협회 주최 제18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는 임영렬 회장 취임 후 처음으로 열린 전국대회로, 400여 명이 출전한 대규모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안지수 선수를 꺾고 우승한 김철민 선수는 세계예술구대회 파견 선수로도 선발된다. 김철민 선수는 이어서 여의도 백화점에서 열린 예술구 프로당구대회에서도 남도열 선수를 따돌리고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다.
문화체육관에서 리그전으로 치러진 아시아3쿠션선수권대회에서는 박병문 선수가 일본 선수들 잡아주면서 장성출 선수가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게 된다.
1995년 한국3쿠션대제전에서 김철민 선수
▶1989년 7월1일 ‘체육시설 설치 및 이용에 관한 법’에 따라 당구 체육시설업으로
1989년 당시 당구는 보건사회부 소관으로 각종 규제가 많았던 종목이었다. 당구장 영업에도 불편함이 많았다. 하지만 1989년 7월1일 ‘체육시설의 설치 이용에 관한 법’이 공포되면서 당구장은 체육시설업으로 규정된다. 이에 따라 보건사회부 소관이던 당구가 체육청소년부로 이관되면서 당구 경기도 체육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당구의 체육부 이관을 기념하기 위해 전국포켓당구대회가 열렸는데 김철민 선수가 우승 한다. 또 대전 강용석 당구클럽에서 열린 대한당구회 주최 제4회 프로당구대회에서는 여수출신 강수만 선수가 우승을, 김용석 선수는 준우승을 차지한다.
여수 출신 강수만 선수
당구장이 체육시설업으로 규정되기는 했지만 실제 이 시기에 당구는 체육으로 인정받지 못 하고 있었다. 당구장을 신설 할 때 ‘학교와 거리제한 200m’ 규정이 계속 적용된 것이다. 학교에 심의를 넣어 결정이 날 때에만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내수 경기 진작을 위해 불필요한 규제 타파를 계속적으로 외치고 있었으나 학교 심의의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후 1994년 ‘체육시설의 이용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고 나서야 당구장은 신고 체육시설업이 될 수 있었다.
▶임영렬 회장 퇴임 후 대한당구협회 19대 회장에 친 경기인 성향 남성우 씨 당선
1988년 취임한 대한당구협회 임영렬 회장이 임기 2년을 마치고 퇴임하면서 후임 회장 선거가 열렸다. 임영렬 회장의 재임 중 독립적인 경기단체 조직을 기대했던 김문장 양귀문 김명석 현덕희 등은 임영렬 회장의 재선에 협조하지 않고 성우협회 회장이자 배우였던 남성우 씨를 회장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 한다. 임영렬 회장과 호형호제하던 이들이 불편한 관계가 돼버린 것이다.
경기인들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남성우 씨는 1990년 4월 제 19대 회장으로 당선된다. 남성우 회장의 취임 후 첫 사업으로 회장기 전국당구선수권대회가 1990년 10월 18일부터 4일간 장충체육관에서 성대하게 열린다. 단체전, 개인전, 포켓, 예술구, 동호인 등 다양한 종목이 치러진 이 대회에서 국제식 3쿠션은 김진삼 선수가 우승, 장성출 선수가 준우승을 하였다. 국내식 3쿠션에서는 부산의 간판스타인 김종구 선수가 우승을 한다. 사구 500점 조는 정유진 선수, 사구 300점 조에서는 다이아몬드 공을 제조하던 김종휘 선수가 우승을 한다. 또 예술구는 인천 길형주 선수, 포켓에서는 광주 출신 정건표 선수가 우승을 차지한다.
대한당구협회 남성우 전 회장
남성우 회장은 당구장을 관리하는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에서 경기단체가 독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구장을 경영하는 경영주들이 협회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보니 모든 행정이 당구장 중심이었다. 그래서 대회나 경기인들에 대한 배려는 항시 뒷전이었다.
이 무렵 경기인들이 독자적인 경기단체 조직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해 마침내 1991년 3월 한국일보 대강당에서 대한당구경기인협회 창립식을 연다. 중앙회 회장에 김영재 씨를 선출하고 서울 변기선, 대구 고창환 등을 중심으로 중앙회 임원을 선임하였다. 이로써 명실공히 전국조직인 대한당구경기인협회가 구성되었다.
1990년 전국당구선수권대회 우승한 장성출 선수
김영재 회장은 대한당구경기인협회가 주최하는 첫 사업으로 88체육관에서 전국당구선수권대회 개최를 선언한다. 국제식 3쿠션과 국내식 3쿠션으로 진행된 대회에서 장성출 선수가 국제식 부분에서, 최문갑 선수가 국내식에서 우승을 하면 대회는 막을 내린다.
<박태호 당구연맹 수석 부회장> news@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