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실질적인 전국조직이었던 대한당구경기인협회의 초대 김영재 회장은 88체육관에서 전국대회를 개최한 뒤 다음 사업을 구상하던 중 BWA(세계프로당구협회)의 초청을 받고 일본에서 열리는 월드컵당구대회에 참석하게 된다.


대한당구경기인협회 초대 김영재 회장


일본 월드컵에 참석한 김영재 회장 서울 월드컵 유치 선언


당시 세계무대에 진출한 한국 선수는 이상천이 처음이었다. 이상천 선수는 스파대회에 출전 뒤 미국으로 건너가 각고의 노력 끝에 BWA 고정멤버로 활동하게 된다.


월드컵당구대회에서 이상천 선수와 만난 김영재 회장은 그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대회 분위기에 취한 김영재 회장은 한국에서도 월드컵당구대회를 개최하고 싶어 했다. 이상천 선수는 자신이 도울테니 한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해 줄 것을 김영재 회장에게 부탁했다. 당시 월드컵을 유치하려면 월드멤버들에게 기본 초청비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담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천 선수의 돕겠다는 말과 현장 분위기에 휩쓸려 김영재 회장은 개회식에서 한국의 월드컵3쿠션당구대회 유치를 선언한다.


하지만 당시 한국당구의 규모나 시장이 월드컵을 개최할 수 있는 환경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결정은 나 버렸고 추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김영재 회장 유성 캉가루 당구대로 월드컵 치러


김영재 회장은 사무총장인 김문장 씨를 월드컵 추진본부장으로 선임하고 재정확보에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유성 캉가루 현두경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해 캉가루 대대 6대를 서울월드컵 공인 당구대로 인증하며 4천만 원의 협찬금을 받기로 한다. 먼저 2천만 원을 받아 이 돈으로 대회를 준비했다.


서울월드컵당구대회는 1991년 12월 11일부터 15일까지 5일 동안 서울 삼풍백화점에서 열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게 악조건이었다. 당구대는 공이 굴러가다가 흐르는 일이 많았고, 공의 구름 역시 좋지 않아 외국선수들이 불만을 드러내는 등 망신의 연속이었다. 당구지를 시모니스가 아닌 유성 라사 특지를 깔았기 때문이었다.


1991년 서울월드컵3쿠션당구대회 노련한 레이몽드 클루망 우승


서울월드컵3쿠션당구대회의 스타는 일본의 마노였다. 마노의 슬로 플레이는 선수뿐 아니라 관중도 불편하게 만들며 여기저기서 웅성거릴 정도였지만, 잇달아 세계유명선수들의 덜미를 잡는다. 결국 마노는 비탈리스 브롬달을 꺾고 결승에 진출한다. 91서울월드컵이 열리기 전 마노는 존재감이 없는 선수였다. 그런데 대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마주친 노련한 클루망은 마노의 인터벌에 흥분하지 않았다. 클루망은 장장 4시간 20여 분에 걸친 접전 끝에 3대2로 신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한다. SBS가 생중계했지만 경기가 지루하게 늘어지며 결국 정규방송에 밀려 끝까지 중계하지 못 했다.


당구황제 레이몽드 클루망 선수


우여곡절 끝에 대회는 마쳤지만 마무리가 문제였다. 결산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집행부는 우왕좌왕했다. 대회를 치르면서 지출된 비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유성 캉가루 현두경 회장이 내놓기로 한 협찬금 중 남은 2천만 원이 입금되지 않아 결국 김영재 회장이 책임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이 일로 경제력이 약했던 김영재 회장은 무력증에 빠졌고 대한당구경기인협회의 혼란이 이어졌다.


서울월드컵 후폭풍에 휩쓸린 협회, 임원 재구성 하며 정상화 박차


평생을 당구와 함께 했고 그 누구보다 당구사랑이 각별했지만 서울 월드컵 개최 이후 겉잡을 수 없이 퍼진 후유증에 김영재 회장은 칩거에 들어간다. 김문장 사무총장 역시 두문불출했다.


이 때 대한당구경기인협회의 정상화를 위해 고창환 이병희 홍상옥 김종구 최태현 백정기 등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김영재 회장의 동의를 얻어 임원을 재구성 한다. 회장권한 대행에 대구시 경기인협회 고창환 회장, 사무총장에 대전경기인협회 이병희 회장이 선임되면서 대한당구경기인협회 재건에 나선다.


대한당구경기인협회 고창환 회장 권한대행


제 2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에서 이천우 선수 우승


대한당구경기인협회는 1992년 제 2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와 제 1회 전국포켓당구대회 겸 동경국제포켓당구대회 파견 선발전을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개최한다.


전국당구선수권대회는 전국에서 400여 명의 선수가 출전해 이천우 선수가 대구 백성우 선수를 이기고 우승한다. 이 대회를 통해 이천우 선수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제2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 우승자 이천우 선수


농구스타 이원우 선수의 동생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천우 선수는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트로크로 많은 동호인들의 롤모델이 되기도 했다. 신예 이천우 선수의 출현과 함께 기존의 스타 선수 장성출 김무순 김정규 최문갑 김철민 강문수 등이 한국당구의 중심인물로 대접을 받는다.


그 후 이천우 선수는 92․93한국당구최강전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넘나들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제 1회 전국포켓당구선수권대회 겸 도쿄국제포켓당구대회 파견 선발전 이장수 우승


한편 도쿄국제포켓당구대회 선발전을 겸한 제 1회 전국포켓당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포켓당구의 원년 멤버인 이장수 선수가 우승을 하며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이 대회에는 이장수 박신영 김정식 이열 정건표 한경용 김원오 등 한국포켓당구의 정상급들이 모두 출전해 한국포켓당구의 변화를 예고했다. 


한국포켓당구의 중심인물 이장수 선수


한국의 포켓당구는 광주와 대전, 전주지역에서 우수 선수들이 많이 배출돼 이들이 한국 포켓당구를 이끌고 있었다. 광주 출신으로는 정건표 이장수 김원석 등이 있었고 대전에서는 박신영 김정식과 다음세대로 현재 한국포켓당구 정상급인 정영화 류승우 등을 배출됐다. 전주 출신으로는 이열 등이 있었다.


박병수 씨 포켓전용구장 오픈, ‘오렌지족’ 몰리며 포켓당구 전성기 열어


이 무렵 외국에서 공부하던 유학파(일명:오렌지족)들이 압구정동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논현동에서 퀸당구장을 경영하던 박병수 씨가 이 무렵 압구정동에 포켓전용구장을 개업한다. 이곳에 유학파들이 몰리면서 소문이 나기 시작해 포켓전용구장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침 미국에서 활동하던 자넷리(재미교포선수)의 세계포켓당구대회 우승 소식까지 전해지며 여자 연예인들이 포켓당구를 배우기 위해 압구정동에 진을 치는 등 한국포켓당구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포켓전용구장 테이프 끊은 박병수 선수


전국에 포켓전용구장이 셀 수 없을 만큼 문을 열었고 당구대 공장들은 포켓당구대 제작에 정신없었다. 전용구장과 함께 3만여 개의 당구장에도 1~2대 씩 포켓당구대가 설치되었다. 또 유명한 세계 미녀선수들이 한국을 찾아 포켓당구를 홍보했고 빌리아드 디너쇼 등 각종 사업들이 펼쳐지면서 포켓당구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박태호 당구연맹 수석 부회장> news@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