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1992년 2월23일 한국당구연맹은 제1회 전국대학생 장학금당구대회를 개최한다. 사회적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온 당구의 이미지 개선과 학교체육으로 추진을 위한 전초사업이었다. 그동안 당구는 ‘무위도식하는 건달들이나 즐기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벗지 못한 채 본질이 왜곡돼 있었다. 억울하고 속이 상할 수밖에 없었던 당구인들은 불명예를 떨쳐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당구연맹 주최 전국학생당구대회 연세대 이장희 우승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개최된 대학생당구대회에 전국에서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신촌이 떠들썩했다. 연세대 이장희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며 대학생 당구제왕에 등극했는데 이 대회를 통해서 그의 존재감을 알리며 많은 당구인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장희 선수


이장희 선수의 부친은 경제기획원 상임위원과 충남 아산의 국회의원 출신으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흔치 않은 가문의 자제인 이장희 선수는 당구에 매력에 빠져 학창생활이 길어졌지만 서울당구연맹 등록 선수로 활동하면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한다. 흔치않은 인재를 당구계가 그냥 두지는 않았다. 이장희 선수는 이후 서울당구연맹과 대한당구연맹 전무이사로 활동하며 한국당구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KBF(한국당구연맹) 창립과 임영렬 회장의 열정으로 당구 제도권 진입


대한당구협회 회장에서 물러난 뒤 임영렬 회장은 유통업을 하던 안영기 당구인, 샌드라 여사와 함께 한국당구연맹(KBF)을 창립한다. 김철민, 김석윤, 김윤석, 김원오 선수 등이 참여해 한국당구연맹 타이틀로 사업을 펼쳤다, 전국규모대회를 월례 평가전 형태로 추진했고 특히 포켓당구대회에 관심을 가지고 매월 미군들과 교류전을 갖기도 했다.


김석윤, 김윤석, 김철민 선수 (왼쪽부터)


KBF 임영렬 회장은 비주류 경기인으로, 주류 당구인들의 사업 방식에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회에만 집중하고 정작 한국당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제시하지 못 한다고 지적했다. 대회와 사업을 많이 한다고 과연 한국당구가 발전할 수 있냐는 것이 임영렬 회장의 주장이었다. 국내에서는 케롬 당구가 중요하지만 국제적으로 시장이 큰 포켓당구에 대한 무관심과 스포츠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대한체육회 가맹에 누구도 관심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절대적 파트너였던 안영기 씨가 임영렬 회장과 결별하고 KBF의 핵심 김철민, 김석윤, 김윤석 등이 한국당구위원회 김문장 회장을 대한당구선수협회 회장으로 추대하면서 당구 조직이 재편된다. KBF소속 선수들도 대거 대한당구선수협회로 이적한다. 그렇게 KBF는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임영렬 회장은 광화문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외롭게 KBF를 지켰다. 이유는 분명했다. 정작 한국당구에 필요한 일들을 대한당구선수협회가 결코 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임 회장은 포켓당구 활성화를 위해 미군부대와 지속적인 교류전 등 여러 사업을 추진했다. 또 지인들을 통해 대한체육회 실무진, 김운용 회장과 접촉을 계속 시도했다. 운영부 직원들이 ‘진드기 왔다’라고 할 정도로 임영렬 회장은 수 없이 대한체육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의 이런 열정에 힘입어 1998년 1월 대한체육회 실무진과 김운용 회장은 조직 체계에도 없는 ‘인정’ 종목으로 당구를 제도권에 진입시킨다.


1985년 당시 임영렬 회장.


임영렬 회장은 한국당구 최고의 로비스트였다. 당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고 작은 선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마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세계당구협회(WCBS) 결성총회에 대한당구협회 양태주 회장이 참석?


1991년 대한당구협회는 양태주 씨를 제 20대 회장으로 선출한다. 양태주 회장은 무교동에서 당구장을 경영하던 당구인으로 추진력과 함께 검소함이 몸에 밴 인사였다. 당구장을 관리하는 경영자 모임체인 대한당구협회는 당시 한국당구의 대표 창구였다.


대한당구협회의 출발은 경기인들이 중심으로, 경기를 중심으로 각종 사업들이 정해졌다. 하지만 조직이 방대해지면서 당구장 경영주들이 협회를 장악하고 경기인들과 불협화음이 커졌다. 경기인들의 영역은 협회 내 ‘선수국’이란 일개 국으로 줄어들었다. 경기인 출신 양귀문, 백충기 등이 선수국장을 맡았지만 그들이 역량을 펼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대한당구협회를 당구장 경영주들이 장악을 하다 보니 경영과 전국 조직의 운영에만 전력할 수밖에 없었다. 회장은 다음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전국 51개 지부장들의 눈치를 봐야 되는 구조였다. 대회를 중심으로 사업들이 펼쳐져야 했지만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대회는 항상 뒷전으로 밀렸고 1년에 한번 전국당구대회와 한일당구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전부였다.


1994 한일당구대회 폐회식 뒤 기념촬영.


국제 업무 역시 치밀하지 못 했다. 경기와 관련된 외국총회에 회장 한사람이 통역도 없이 홀로 참석하는 일들이 이어졌다.


1992년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세계당구협회(WCBS) 연합체 결성 총회에 대한당구협회 양태주 회장이 한국대표로 참석한다. 스위스 총회는 케롬, 포켓, 스누커, 잉글리시 등 종목별 세계기구의 상급조직을 만들어 올림픽 종목 신청 등 창구 일원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구장을 관리 운영하는 대한당구협회 회장이 참석하면서 총회에서 다뤄진 안건에 대해 이후 국내 당구 경기인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이해시키기 쉽지 않았다. 당시 대한당구협회는 3만5천여 당구장에서 거둔 월회비와 가입비로 재원이 넘쳤다. 그래서 해외에서 열리는 총회를 실무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기보다 외유에 더 무게를 두지 않았나 생각된다.


<박태호 당구연맹 수석 부회장> news@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