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흔
99프로야구 최우수신인선수로 선발된 홍성흔. (스포츠서울 DB)

[스포츠서울 장강훈기자] ‘세기말’로 불린 1999년, 한국 프로야구는 혼돈의 시대였다. 전통의 강호 해태와 현대가 양대리그 제도의 희생양이 됐고 한화가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 해 정규시즌 최고 승률(0.598)을 차지한 두산은 시즌 전 경희대 출신의 포수 홍성흔(42·현 샌디에이고 코치)을 1차 지명으로 선발했고 야구팬은 그를 ‘오버맨’이라고 불렀다. 20년이 흐른 2018년 홍성흔이 프로에 데뷔하던 해에 태어난 ‘슈퍼루키’가 리그를 강타하고 있다.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KT의 ‘미래’ 강백호(19)가 1999년 신인왕 홍성흔과 태평양을 사이에 둔 가상 데이트를 가졌다. <편집자 주>

[포토] 신인상 이정후, 서울고 강백호와 나란히~
7일 서울 강남 L타워에서 열린 ‘2017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의 날’ 행사가 열렸다. 넥센 이정후가 시상식 전 서울고 강백호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끝없는 야구 욕심 세대공감

2016년을 끝으로 두산에서 은퇴한 홍성흔과 올해 데뷔한 강백호는 접점이 없다. 홍성흔은 “강백호의 명성이 워낙 자자해 동영상 사이트에서 찾아봤다”고 말했다. 강백호 역시 “선배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직접 뵌적은 없다”고 낯설어했다. 하지만 야구라는 매개체가 등장하니 대화의 깊이가 달라졌다. 홍성흔은 “이제 프로 1년차이니 실패해도 괜찮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시즌을 치르다보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운을 뗐다. 강백호가 던진 예리한 질문들에 야구에 대한 열정과 끝없는 욕심이 여과없이 투명된 탓이다.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던 강백호는 “신인이라는 틀에 갇히고 싶지는 않다. ‘신인이니까’라는 핑계로 뒤에 숨어있으면 앞으로도 1년차니까, 2년차니까 등 변명만 쌓이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신인이라는 틀을 깨야 한다. 사람마다 가진 능력치가 다르다. 지금의 내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열정만큼은 ‘슈퍼루키’가 ‘오버맨’을 제압했다.

◇꾸준한 선수가 되고 싶다

강백호의 최대 고민은 ‘꾸준한 선수’다. 그는 “미래에 어떤 선수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보다 지금, 오늘 등 현재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다보면 그 경험이 쌓여 먼 훗 날 어떤 선수가 돼 있지 않겠는가”라며 철학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도 “홍성흔 선배님은 2000안타, 200홈런, 1000타점 등 선수생활을 오래 해야만 가질 수 있는 기록들을 많이 세우셨다. 꾸준히 경기에 나갈 수 있는 노하우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홍성흔은 “자기 만의 루틴을 착실하게 지켜나가다보면 꾸준한 선수가 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는 “휴대전화만 쳐다보지 말고 일기를 쓰든지 야구책을 읽든지 명상을 하든지 자기만의 루틴을 하나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루틴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다보면 꾸준한 선수가 될 수 있다. (타격은 사이클이 있기 때문에)업다운이 심하면 금세 지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루틴이 필요하고 정한 루틴을 꾸준히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강백호
2018 프로야구 KBO리그 kt 위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가 20일 수원 kt위즈파크에서 열렸다. kt 강백호.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 하루도 빼먹지 않은 108배

현역 시절 홍성흔은 매일 108배를 했다. 홍성흔은 “종교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개인의 성향이다. 나는 포수이기도 했기 때문에 하체와 코어 근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밖에서는 ‘오버맨’으로 불렸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물론 은퇴할 무렵에는 빼먹는 날도 있었지만 매일 108배를 했다. 원정경기를 가면 룸메이트에게 방해될까 싶어 화장실에서 108배를 하기도 했다. 신인 때에는 강병규 형과 한 방을 썼는데 방 안에서 땀을 흘리기 죄송해 화장실에서 혼자 108배를 하고 나온 기억이 있다”며 웃었다. 루틴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던 그는 “대학 때에는 일기도 꾸준히 썼다. 메모하는 습관을 유지했더라면 내 야구인생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 투수 뿐만 아니라 타자들의 습성을 꼼꼼히 기록해 자신만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면 더 좋은 성적을 기록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홍성흔은 “TV나 휴대전화를 보다가 잠들고 눈 뜨면 야구장에 가는 일의 반복이다. 자기만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지친다. 그래서 루틴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경기시작 30분전 간절한 기도

‘슈퍼루키’답게 강백호도 자기만의 루틴이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비밀이지만 스포츠서울 창간 특집 인터뷰라 기꺼이 공개했다. 강백호는 “매일 경기 시작 30분 전에 외야로 달려 나간다. 중앙 펜스에 새겨진 숫자(거리표시)에 부모님과 내 이름, 할머니 존함을 이니셜로 쓰고 5분 간 기도를 한다. 오늘도 무사히 우리 가족을 지켜달라고 할머니께 말씀 드린다. 어제는 지나간 일이니 오늘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치르는 나만의 의식”이라고 밝혔다. 프로 유니폼을 입은 손주를 보고 싶어했던 할머니는 스프링캠프 기간에 별세했다. 강백호는 “강하기만 한 것 같던 아버지가 눈물 흘리시는 것을 처음 봤다. 나는 미국에서 캠프를 하고 있어 장례식에도 참석 못했다. 할머니께서 프로에서 뛰는 모습을 정말 보고 싶어 하셨는데 장례식에도 못간 죄송함 때문에 캠프 때부터 매일 기도를 드린다. 할머니는 좋은 곳에 가셨으니까 우리 가족 잘 지켜봐 달라고 말씀드린다. 그게 루틴이 됐다”고 말했다.

홍성흔
머리에 가발을 쓰고 올스타전을 빛낸 롯데 홍성흔이 플라이로 물러나고 있다. 강영조기자 kanjo@sportsseoul.com
◇ 욕심부리지 마 vs 만족을 못해요

홍성흔은 강백호의 질문을 찬찬히 듣더니 “덩치에 맞지 않게 부드러운 스윙을 하는데 너무 강하게 치려는 것 같다. 욕심이 많다는 의미인데 그 자체는 나쁜게 아니다. 다만 욕심이 과하면 금세 지친다. 아직은 배운다는 자세로 임하는게 좋다”고 조언했다. 강백호가 타격감이 떨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빨리 회복할 수 있는지를 물었기 때문이다. 홍성흔은 “체력이 떨어지면 배트 스피드가 무뎌진다. 이런 경험이 적으면 심리적으로 조급해진다”고 밝혔다. 체력은 휴식을 통해 회복할 수 있고 오버스윙은 의도적인 밀어치기로 극복할 수 있다. 홍성흔은 “나는 슬럼프에 빠지면 2루수 방면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만드는 훈련을 정말 많이 했다. (강)백호는 유격수 머리로 타구를 보낸다는 기분으로 스윙을 하다보면 감이 잡힐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슬럼프가 오면 코치한테 가서 함께 연구하는 게 중요하다. 비디오 분석도 하고 얘기를 나누다보면 ‘이거다’하고 감이 올 때가 있다”고 말했다. 강백호는 “4타수 2안타를 치면 ‘왜 3안타를 못쳤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를 조금 더 믿었더라면 하는 자책도 한다. 신인이기 때문에 팀에 기여도가 없는게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팀 상황이 안좋다보니 더 많이 출루하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하다”고 말했다. 만족을 모르는 ‘겁없는 10대’ 그 자체다.

[포토] 최태원 코치 \'시원하지?\'
2018 프로야구 KBO리그 두산 베어스와 kt 위즈의 경기가 14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다. kt 강백호가 최태원 코치와 훈련 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선비 스타일, 걱정 마세요

강백호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강점은 음주와 흡연을 못한다. 그는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맥주 한 잔도 못마신다. 몸에 두드러기가 생기고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어머니는 탄산음료도 못드신다”고 말했다. 기관지가 약해 담배연기도 못맡는다. 홍성흔이 우려한 ‘나쁜길’로 빠질 여지가 상당히 줄어든 셈이다. 강백호는 스스로를 ‘선비 스타일’이라고 했다. 집, 야구장, 집이 전부다. 가끔 친구들이 찾아오면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를 가기도 하지만 주 활동 무대는 집이다. 그는 “영화보고 음악듣고 노래방가는 정도? 게임도 가끔하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잘 안한다”고 말했다. 강백호는 “시즌 초반에는 외야에서 별 따러 다녔다. 요즘은 당시와 비교하면 많이 좋아졌다. 꾸준히 훈련하면서 수비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신인답게 내 성격답게 과감한 플레이를 시즌 끝까지 하고 싶다. 욕심과 과감함은 한 끗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 경계를 지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나만의 길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강조했다. 홍성흔은 “스스로 신인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나는 신인 때 2~3년 가량 뛴 선수라는 생각을 했다. 겸손해야하지만 타석에 서면 투수를 잡아먹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오버맨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 계기였다. 째려보기도 하고 욱하기도 하고 한마디로 밉상이었다. 내가 해결사라는 마인드를 가져야 주눅들지 않고 자기 야구 할 수 있다. 팬 서비스도 잘하고 올스타전에 출전하면 가발도 한 번 써보고 그래야 큰 선수가 된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홍성흔은 “너무 좋은 공부를 하고 있는 시기라 조급할 필요도 욕심낼 필요도 없지만 정말 엄청난 선수가 KBO리그에 나타난 것만은 틀림없다. 더 큰 꿈을 갖고 최고의 선수가 되기를 바란다”고 덕담을 건넸다.

다른 듯 닮은 신·구 ‘슈퍼루키’들의 유쾌한 대화였다.

zzang@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