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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영화에선 섬으로 갔지만 이날 내게 남쪽은 전남 장흥 정남진이었다. 광화문에서 쭉 일직선을 그으면 북으론 중강진 남으론 정남진이 나온다. 이 세 곳은 죄다 경도 126도58분35초다. 당장 남쪽으로 튈수 밖에. 모두들 모래시계에 나온 정동진만 알고 있을 무렵, 장흥군은 지난 2005년 관산읍 신동리를 공식적으로 ‘정남진’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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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흐렸지만 온풍이 불고있다. ‘무선충전의 원리’였던가. 수채화 팔레트처럼 색이 입혀진 남도 장흥의 풍광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몸이 훈훈해진다. 정남진에는 비옥한 득량만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대가 있다. 계단을 따라 각층에는 재미난 콘텐츠를 모아놓아 걸어내려오는 재미도 쏠쏠하다.
옆에는 상징탑도 있고 입구에는 안중근 장군(의사)의 동상이 있다. 왜 이곳에 황해도 해주 출생에 뤼순 감옥에서 서거한 안 장군의 기념물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마침 장흥군 정종순 군수가 알려줬다.
안중근 장군의 유해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대신 안 장군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이 바로 장흥에 있다.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에 위치한 해동사(海東祠)는 안중근 장군을 모시고 그 옆 만수사(萬壽祠)는 순흥 안씨의 문중 선조 6인을 모신다.
해동사에는 안 장군의 영정과 친필 유묵 사본이 있지만 장군의 위업에 비해 허하다. 장흥군은 올해부터 3년간 장동면 해동사 인근에 사업비 70억원을 들여 ‘안중근 의사 문화관광자원화’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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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순 군수는 “이 사업을 통해 장흥군의 역사·문화 관광의 새 기반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동사 인근에 교육체험관 애국탐방로 메모리얼파크 등이 들어서면 역사·문화 관광명소이자 청소년 교육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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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에는 또다른 항일 기념명소가 있다. 이순신 장군이 복권 후 삼군수군통제사로 취임한 회령포다. 당시 원균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후 경상우수사 배설이 수군통제영을 장흥 회령포로 옮겨 피신했다. 통제영이라 해봤자 부서진 배 12척(아직 남아있다는 바로 그 12척)뿐 아무 것도 없었다. 이곳에서 진영을 가다듬은 충무공은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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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산 바다 맛있는 장흥
오로지 득량만에서만 낙지를 받는다는 대물상회 최문갑 사장에게 연락을 남겼더니 대번에 답이 돌아온다. “맛있는 것 잔뜩 먹고 있겠네.” 그렇다. ‘남쪽’은 예쁘고 따뜻하기만 한 곳은 아니었다. 제철 먹거리가 잔뜩 나는 맛있는 곳이었다. 먹어야 한다. 그냥 올라오면 손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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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진 부근 남포마을을 갔다. 굴과 키조개가 나는 곳이다. 특히 연중 사리 때면 귀하다는 자연산 키조개까지 캐올 수 있다. 마침 할머니들이 봄볕 아래 키조개를 다듬고 있었다. 바다로 향한 작업장은 비록 고된 삶의 현장이겠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풍경이 너무도 좋다. 마이크로웨이브처럼 몸을 덥히는 볕을 쬐며 한참을 바라봤다. 할머니 우묵 패인 눈으로 노오란 키조개 살이 들어오면 살짝 주름이 접히는 듯 입가로 웃음이 배어난다. 보는 이도 덩달아 기분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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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은 산 숲 강 호수 바다를 품은 고장이다. 당연히 좋은 식재료가 골고루 난다. 품질 좋기로 소문난 천관산 한우야 워낙에 유명하고 진한 풍미의 표고버섯도 양과 질에서 알아준다. 바다는 더 비옥하다. 낙지와 주꾸미가 유명하고, 키조개 바지락 꼬시래기 갑오징어 미역 굴 피조개 등 한화아쿠아플라넷처럼 많은 종이 득량만 기름진 바다에 모여있다. 특히 청정해역이라 산(酸)처리를 할 필요없는 김,즉 무산김의 고향이 바로 장흥이다.
먹거리가 걱정이다. 없어서가 아니라 많아서다. 예전에 인도를 간 적 있는데 9일 머문 동안 커리를 30끼 정도 먹은 기억이 있다.(간식 포함)물론 맛있었지만 만약 장흥에서 아흐레를 보냈다면 매번 다른 메뉴를 먹을 수 있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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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장흥 삼합’을 빼놓을 수는 없다. 삼합(三合)이란 세 가지 어울리는 것을 이른다. 장흥에선 한우와 표고,키조개(관자)다. 들 산 바다에서 나는 진미가 한데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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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읍내 맛나숯불갈비를 갔다. 벽지 문양처럼 화려한 마블링의 고기와 함께 삼합세트(키조개 관자·표고버섯)를 샀다. 삿갓모양 불판에 고기를 올린다. 가장자리는 육수가 흘러드는 곳이다. 여기에 살짝 구운 키조개 관자와 표고를 넣으면 된다. 큼지막한 관자에 고기를 올리고 버섯을 고명처럼 얹어 한입에 틀어넣었다.
부드러운 고기,졸깃한 관자,탱탱한 표고…. 맛의 크레모어,세열수류탄이랄까. 제각각 다른 저작감에다 특색있는 육즙을 입안에 터뜨린다. 조개와 고기 버섯은 원래 천연조미료의 재료 아닌가. 맛이 없을 리가 없다. 미처 터지지 못한 감탄이 코로 튀어 나온다. 먹기 전 코를 풀어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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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한판이 순식간에 꿀꺽이다. 워낙 슬쩍 익혀도 되니 사라지고 없다. 3개를 함께 곁들여야 하는 수고가 있지만 육회먹듯 금세 먹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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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징어와 주꾸미 등 연체동물도 먹어야 한다. 카드를 연체하더라도 사먹어야 한다. 바지락도 바지런하게 챙겨 먹어야 한다. 먹성도 살아나는 봄이니까. ‘남쪽’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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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카페트 위로 성큼성큼 봄이 오신다
봄꽃 중엔 동백이 있다. 이름엔 겨울이 들어가지만 봄과 가장 어울린다. 봄이 오는 길을 장식하는 붉은 카페트라고 해야할까. 송이 째 뚝뚝뚝 떨어진 모습이 고와도 너무 곱다.
국내 최대 동백 자생지가 천관산(723m) 자연휴양림 근처에 있다. 하늘같은 관을 썼다는 그 산이다. 동백숲 꽃 터널을 걷는 산책길도 있다. 무려 2만 그루가 20만㎡에 모여있다. 2007년 단일 수종 최대 군락지로 한국 기네스 기록에도 등재됐다. 멀리서보면 매끈한 이파리를 가지가 휘도록 두른 푸른 숲같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보석같은 꽃송이가 보인다. 나무 아래로 들어가면 더욱 빨갛다. 꼭 누군가 모아놓은 것처럼 바위 위에도 졸졸 흐르는 계곡에도 붉은 화환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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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속 분위기는 어느 동화 마을같다. 꽃 그림자 아래 바닥을 붉고 수령 오랜 동백나무는 매끈한 허리를 이리저리 휘며 솟아났다. 첩첩 멀어지는 자태가 신비스럽다. 숲 끝에서 누군가가 말을 타고 달려올 듯한 분위기. 그게 손에 제 머리를 들고 달려온 호스맨(영화 ‘슬리피 할로우’)이라 해도 멋지게 보일것만 같다.
동백은 너무도 붉지만 또한 너무도 푸른 이파리와 함께 있어 나무 전체가 그리 예쁘지는 않다. 벚꽃이나 매화처럼 꽃나무로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가나초콜릿 광고 속 이미연(혜리였나?)처럼 무성한 잎 속에서 고운 얼굴을 슬쩍슬쩍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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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떨어진 모습은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바닥에 다시 피어난다 해야 할까. 붉은 꽃잎 샛노란 술이 새싹 오르는 봄 땅바닥에 잔뜩 깔린다. 순백으로 화사하게 피었다가 휴지처럼 지저분하게 떨어지는 목련과는 차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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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가련하다. 하늘하늘한 꽃잎 몇 개가 아니라 꽤 커다란 송이가 툭툭 떨어진다. 송창식은 ‘눈물처럼’이라 했고 또 누군가는 ‘모가지’로 상상했다.
어찌됐든 슬프도록 곱다. 눈물이 난다. 꽃가루는 없었다.
demory@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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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여행정보●둘러볼만한 곳=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에선 산림욕을 즐길 수 있다. 40년 이상 편백나무가 오밀조밀 모여있다. 산 허리에선 천관산 ‘좋아요’ 바위도 보인다. 우드랜드 (061)864-0063. 소등섬 앞바다 남포마을에선 자연산 굴구이를 마지막으로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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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
장흥삼합은 토요시장 근처와 시내 부근에서 쉽게 맛볼 수 있다. 정남진 만나숯불구이는 좋은 고기와 엄청난 칼솜씨로 유명한 집이다. 식육식당이라 고기와 삼합세트를 구입 후 불판에 구워먹으면 된다.
봄조개라고 바지락회가 좋다. 사실 살짝 데친 것이다. 미나리 표고 양파 고춧가루를 넣어 무친 바지락은 탱글탱글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갑오징어 숙회도 맛있다. 졸깃한 숙회를 먹고나면 먹물에 밥을 볶아준다. 황홀한 맛을 낸다. 안양면 ‘여다지회마을’에서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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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량만에서 많이 나는 주꾸미는 장흥읍 ‘삭금쭈꾸미’에서 맛볼 수 있다. 간판은 ‘용두동’이라 쓰여있지만 안에 들어가면 내공깊은 집임을 대번에 알게된다. 주꾸미 샤브샤브에 칼국수며 밥까지 한방에 뚝딱 해치울 수 있다. 누가 남도 아니랄까봐 반찬도 죄다 맛있다.
●숙소=장흥읍 안(安)호텔은 새로 지어 깨끗하다. 시내와 가까워 위치도 좋다. 간단한 조식도 준다. 장흥에는 안씨가 많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