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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 조현정기자]“내가 배우였다는 걸 기억하고 싶다. ”

연기파 배우 이성민(54)이 영화 ‘리멤버’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자신의 나이보다 30살 정도 많은 뇌종양에 걸린 80대 알츠하이머 노인 한필주로 분해 극을 이끈다. 영화는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들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80대 알츠하이머 환자 필주가 기억이 다 사라지기 전, 평생을 준비한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지난 17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성민은 촬영을 마친 뒤 2년여 만에 개봉하게 된 걸 반기며 배우로서 무게감을 전했다. 매 촬영 때마다 2~4시간 노인 분장을 하고 구부정한 자세로 지내느라 목디스크까지 걸렸지만 노인연기가 매력적인 지점이자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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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멤버’ 스틸컷

◇이성민이 아닌 80대 노인의 입장에서 연기하는 게 매력

이성민은 ‘리멤버’에 출연하게 된 이유로 “(영화 ‘검사외전’에서 호흡을 맞췄던) 이일형 감독의 작품인 데다 필주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새로운 시도이자 흥미로워서였다”고 밝혔다. 쉰 목소리와 느린 걸음걸이 등 실제 80대 노인을 방불케하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쳐 관객을 극에 빠져들게 한다. 그는 “이야기 구조가 일제시대를 겪은 할아버지와 그 시대와 한참 떨어져있는 청년의 동행이어서 매력적이었다”며 “필주 캐릭터가 고령의 노인이기도 하지만 60년 동안 쌓아온 한을 내가 아닌, 80대 노인 입장에서 연기하는 게 어떻게 표현될까 하는 기대가 배우로서 매력적인 지점이었다”고 말했다.

3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야 하는 만큼 특수분장에 신경을 많이 썼다. “실제 그 연세이신 선생님들과 같이 연기해야 해서 같은 앵글에 잡혔을 때 이질감이 들지 않게 하려고 (분장)테스트를 많이 했고 하나씩 극복해나갔다. 처음엔 분장에 4시간이 걸렸는데 시간을 점점 줄여나가 최종 2시간 조금 더 걸린 것 같다.”

노인으로 분장한 자신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어땠을까. 이성민은 “젊은 시절 연극할 때 분장으로만 노인 역을 해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때는 ‘아버지를 닮았구나’ 했는데 이번엔 특별한 기분은 안들었다. 분장을 처음 하고 아내에게 사진을 보내줬더니 ‘보기 싫다’고 하더라. 그 정도로 밉지는 않은 것 같은데”라고 웃음지었다.

80대 혁주를 연기하면서 각별히 신경쓴 부분에 대해 “연기할 때 치밀하게 계산한 건 아니고, 캐릭터를 준비할 때부터 무의식중에 이렇게 해야지 하고 잠재돼 있었던 게 촬영 때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다”면서도 “관객이 나로 인해 몰입에 방해받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영화 시사회 때 그런 지점을 유심히 봤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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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20대 연기한 남주혁 대단해

‘리멤버’는 반일 프레임을 강조하기 보다 개인의 복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성민은 “우리 영화를 준비하고 찍을 때 개봉 무렵 ‘또 이런 영화야?’하는 소리가 나오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다. 그런데 근래 정치권에서 이런 이슈(과거 청산문제)가 있어 우리 영화가 작지만 설득력있게 다뤄주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가 있다”며 “우리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그 시대(일제강점기)를 겪은 할아버지와 그 시대와 동떨어진 청년이 동행하며 화합하고 화해해 같이 가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함께 아르바이트하던 20대 청년 인규(남주혁 분)가 늘 필주와 함께 한다. 남주혁과의 첫 연기호흡에 대해 “처음부터 좋았다. 주혁이가 덩치도 크고 아들이라 해도 믿을 정도의 나이인데도 듬직해 보였고 워낙 맑고 경계심이 별로 없더라”고 만족해했다.

그러면서 남주혁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를 보다가 ‘주혁이가 참 잘했구나, 고생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필주의 동선을 따라가지만 관객들을 필주에게 몰입하게 하는 건 인규다. 노인이 가는 길에 동참하고 휩쓸리는 인규가 설득력이 없으면 관객이 못따라갈 것이다. 남주혁의 인규 연기가 뛰어났다. 인규라는 캐릭터가 20대의 복합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는데 잘생기고 키 큰 남주혁이 평범함을 연기하는다는 게 힘든 일이다.”

오는 12월 현역으로 군입대하는 남주혁에게 “무조건 건강하게 잘 마치고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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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배우였단 걸 마지막까지 기억하고파

쉬지 않고 연기를 해온 그는 디즈니+오리지널 시리즈 ‘형사록’과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로도 조만간 시청자들과 만난다. 다작의 원동력에 대해 “현장이 좋고 거절을 잘 못한다”고 살짝 얼굴을 붉혔다. “스무살에 처음 극단에 찾아가 지금까지 연기하고 있는데 나로 산 시간보다 어떤 캐릭터의 옷을 입고 산 시간이 더 많은 것 같고 더 편하지 않나 싶다. 그렇지만 작품과 작품 사이의 휴식은 굉장히 달콤하다. 하하.”

극단생활이 아닌 드라마와 영화 연기를 하던 초창기에는 대인관계가 힘들었다며 “무대에서 많은 관객들 앞에서 연기하는 건 떨리지 않는데 처음 만난 사람들앞에서 대본을 읽고 연기하는 게 공포스러웠다. 일종의 공황이라는 걸 그땐 몰랐다. 극강의 낯가림이 심했는데 세월이 지나니 그런 문제도 무뎌지고 극복한 것 같다”고 고백했다.

2년여 전에 촬영을 마친 영화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 흘렸다고 했다. “필주에게 몰입된 것도 있고 영화가 오랜만에 개봉하는 것에 대한 감정도 있지 않을까. 우리 영화가 언제쯤 개봉하나 했는데 극장에 걸릴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다. ”

‘리멤버’의 필주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면서 손가락에 복수해야 할 인물들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이성민은 생의 마지막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기억에 대해 “내가 배우였다는 사실이다. 평생 하고 있지 않나”라고 꼽았다.

한편 ‘리멤버’는 오는 26일 개봉한다.

hjcho@sportsseoul.com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