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조은별 기자] “데이식스 팬이랑 잔나비 팬이 펜스 앞자리 놓고 한판 붙었대?”
귀를 의심했다. H.O.T와 젝스키스의 전설의 여의도 패싸움이 떠올랐다. 1997년 가요시상식 공개방송 입장을 앞두고 양팀 팬들이 패싸움을 벌인, K팝 팬덤 시조새들의 전설같은 이야기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2012)을 통해 묘사된 패싸움은 당시 신문 사회면을 뒤덮었다.
지난 3일부터 4일까지 인천 송도 달빛 공원에서 열린 2024 펜타포트 록페스티벌(이하 ‘펜타포트’)이 올해 이례적으로 공지문을 게재했다. 밤샘 대기 및 대기명단을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펜타포트 현장은 ‘야외 한증막’이라는 말에 걸맞는 찜통더위 속에 열린다. 현장 기온은 평균 35도에 달했고 올해는 이상 폭염으로 체감온도가 40도까지 치솟았다.
밤에도 덥기는 매 한가지다. 데이식스는 페스티벌 마지막 날인 4일 서브 헤드라이너다. 이들을 보기 위해 무더위를 이기고 이틀 전부터 밤샘 줄을 섰다는게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지난 3일 현장에서 만난 관계자들은 한목소리로 데이식스 팬덤의 극성을 우려했다. 펜타포트에 아이돌 팬덤이 수혈된 건 최근 10년 내 처음이다. 여러 아티스트가 출연하는 페스티벌 현장에서 특정 아티스트를 보기 위해 줄을 서는 건 펜타포트 역사상 처음이다. 팬데믹 이후 유례없는 호황을 맞은 공연가는 지난 2022년 이태원 참사를 겪은 뒤 안전사고에 경각심을 높였던 터라 이들에 대해 극도로 경계했다.
현장 기자들도 “내일 데이식스 팬들과 잔나비 팬들이 싸우는지, 혹여 흥분한 데이식스 팬들이 스탠딩 앞자리로 가기 위해 사고를 치는지 지켜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아니나 다를까. 4일 오전부터 펜스 앞자리를 놓고 데이식스 팬과 잔나비 팬이 한판 붙었다는 정체불명의 커뮤니티 글이 돌았다. 스탠딩 존은 그늘 한 점 없이, 태양을 머리에 이고 뛰는 곳이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더웠다. 폭염 때문에 열사병을 호소하는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정오부터 4시 이전까지 나오는 팀들은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덜하다. 오후 7시 40분, 9시 40분 출연인 데이식스와 잔나비를 보기 위해 그 시간부터 펜스를 붙잡고 더위를 견뎠다면 이미 열사병에 걸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누가, 왜 그런 글을 올린 것일까. 아마도 국내 마지막 남은 록페스티벌에 팝밴드, 그것도 K팝 아이돌을 대표하는 JYP엔터테인먼트 출신 밴드가 서브 헤드라이너로 서는 것에 대한 고까운 시선이 담긴 글 아니었을까.
최근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음악 페스티벌들이 모객을 위해 인기 아이돌 가수들을 페스티벌 성격, 음악 장르와 상관없이 무대에 세우는 것에 대한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데이식스는 펜타포트에 앞서 지난 5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서울재즈페스티벌 무대에도 올랐다. 이들의 최근 인기를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지만 서울재즈페스티벌의 성격을 감안하면 ‘이상한 캐스팅’이기도 하다.
다행히 펜타포트에서 H.O.T VS 젝스키스 팬덤같은 패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데이식스가 무대 준비를 위해 악기를 튜닝하자 거의 모든 관객들이 스탠딩 존으로 달려갔다. 덕분에 긴 줄이 늘어섰던 화장실과 푸드존이 한가할 정도였다.
마침내 무대에 오른 네 남자가 ‘웰컴 투 더 쇼’로 물꼬를 트자 현장은 떼창으로 들끓었다. ‘좀비’,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등 히트곡들의 멜로디가 송도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음악으로 하나 된 관객들은 싸울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이날의 한페이지를 행복하게 만끽했다.
이어지는 잔나비 무대도 마찬가지였다. 잔나비는 펜타포트를 통해 성장한 밴드다. 2014년 펜타포트 슈퍼루키로 선정된지 10년만에 펜타포트 헤드라이너를 꿰찼다.
꿈의 무대에 선 이들은 한편의 뮤지컬처럼 기승전결 구조를 갖춘 무대를 선사했다. 평소 단독콘서트에서 선보이는 빈티지한 스크린, 각종 타이포그래피, 객석을 향한 비치볼 등 볼거리와 들을거리를 섬세하게 마련했다. 양 가수의 무대 모두 음악을 즐기려는 젊은이들의 진심만 엿보였을 뿐이다.
‘옥에 티’는 ‘록꼰대’들의 편견에 가득 찬 시선이다. 시종일관 “밤샘 줄이나 서는 K팝 팬들이 록페스티벌에 대해 뭘 알아”라는 ‘록부심’ 가득한 지적이 몰입을 방해했다. QWER이 출연하는 건 음악적 다양성이고, 데이식스는 오로지 팬덤들을 대상으로 한 표팔이 장사일까. 1950년대 미국에서 출발한 ‘록’ 장르가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을 표현한 음악이라는 것을 떠올린다면 이같은 편견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금세 깨달을텐데. 한때 록음악을 해방구라며 즐겼던 그들도 어느새 꼰대가 됐다. mulgae@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