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뉴욕 번화가 클럽에서 스트리퍼로 일하는 아노라(마이키 매디슨 분)는 남자를 가려받지 않는다. 나이나 체형도 따지지 않는다. 웃음과 몸을 판다. 그에게 뜻밖에 손님이 온다. 러시아 갑부 아들 이반(마르크 에이델스테인)과 꿈같은 사랑이 시작된다.
내달 6일 개봉하는 영화 ‘아노라’는 신데렐라 이야기 전형성을 좇는다. 적어도 초반엔 그렇다. 매일 다른 남자를 상대하며 자신의 성(性)을 팔아왔다. 그에게 청혼하는 남자가 의아하게 느껴진다. 전화번호를 넘기고 밖에서 본격적인 만남을 시작한다. 질펀한 관계를 수없이 맺는다. 호르몬이 둘은 쾌락으로 인도한다. 남성이 내뿜는 에스트로젠과 여성이 가진 옥시토신이 벌이는 화학적 결합은 이들을 결혼까지 가게 만든다.
집을 가보곤 더 놀란다. 즐비한 슈퍼카에 대저택을 보곤 더 반한다. 이반은 침대 위에서 아노라에게 결혼을 해달라고 말한다. “진심이냐?”(Are you serious?)고 되묻는다. 그녀를 갖고 싶은 마음에 무슨 말인들 못 할까. 둘은 라스베이거스로 가 결혼 서약을 하고 혼인신고까지 하기에 이른다.
경쾌한 음악과 폭죽, 호텔에서 파티가 이어진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지만, 불청객으로 쪼개지기 시작한다. 이반 부모는 아들이 매춘부와 결혼했단 사실을 알게 되자 극대노한다. 미국에 있는 하수인 3인방에게 지시한다. 둘을 잡아 혼인무효소송을 진행하고 한다.
곧바로 험상궂은 3인방이 들이닥친다. 아노라를 잡기 위해 힘을 쓴다. 이반도 내 아내를 건들지 말라며 저항한다. 잔뜩 부풀어 오른 사각팬티를 입은 채 나설 때만 반항이 계속되는 듯 했다. 부모가 러시아에서 오고 있단 소식을 듣자, 태도가 돌변한다. 옷을 주섬주섬 입더니 줄행랑을 친다. 어이없어하는 것도 잠시, 결국 아노라는 포박된다.
이반을 잡기 위해 3인방과 기이한 동행이 시작된다. 아노라는 신데렐라가 됐다며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 클럽을 떠났다. 거기서 다시 이반과 동료들을 맞이할 줄은 몰랐다.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반을 보고 상대하는 여성 머리채를 부여잡고 뜯는다.
애초 결혼이 성립되기 어려운 관계였다. 달콤한 사탕발림에 넘어갔다는 걸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반을 붙들고 묻는다. 이혼할 거냐 묻는 아노라에게 이반은 당연한 게 아니냐고 차갑게 대답한다. 창녀라고 퍼붓는 이반 어머니 앞에서 논리적으로 반박도 해보고 악도 써보지만, 체념은 시간문제다.
영화도 차갑게 식는다. 아노라와 3인방이 부딪히며 빚어낸 부조리극은 웃음에서 비애로 젖어 든다. 아노라는 사랑을 몰랐다. 매일 남자와 사랑을 나누지만 어디까지나 육체적 사랑에 불과했다. 정신적 사랑까지 나아가 행복한 결말을 기대했던 관객 상상을 뒤집어 놓는다.
‘아노라’는 현대 사회에 내재한 계급의식이 가진 냉정함을 보여준다. 부모가 쌓은 부로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이반을 중심으로 위로는 부모, 아래로는 3인방이 위치한다. 자신이 고용한 이에게 충성해서 최대한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는 게 이들 임무다. 이 가운데 이고르(유리 보리소프 분)는 다른 목소리를 낸다. 이반에게 사과하라고 다그치는 반면 아노라에게는 위로를 보낸다.
마지막 헤어짐이 다가온 순간, 아노라는 이고르 몸을 눕히고 사랑을 하려 한다. 이렇게 밖에 사랑이란 감정을 전달할 수 없는 자기 모습이 초라해져 가슴에 얼굴을 퍼붓고 눈물을 쏟아낸다. 창밖의 날리는 눈발과 삐걱대며 움직이는 와이퍼 소리가 모든 게 끝났다는 신호음으로 쓸쓸함을 더한다.
베이커 감독은 ‘성매매의 비범죄화’를 주장해 왔다. ‘성노동’에 대한 직업적 정체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5월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성노동은 직업이자, 생계 수단이자, 경력이며 존중받아야 한다. 성노동자의 몸을 어떻게 쓸지는 그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간 다섯 편이 성 노동자에 대한 영화였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과 접촉하고 친해지며 ‘그 세상에는 전할 이야기가 100만 개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전 세계 영화 매체들이 매긴 평점들을 취합해 평균 평점을 산출하는 영국 매체 스크린데일리 별점에서 최고점에 가까운 3.3점을 받았다. 미국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은 테런스 맬리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2011) 이후 약 13년 만이다. ‘아노라’에 쏟아지는 호평은 차가운 계급 의식과 성 노동자에 대한 뜨거운 논쟁적 지점을 제대로 결합한 덕분일 것이다. socool@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