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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고진현 부국장]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일까. 스포츠에선 이상한 징크스 하나가 있다. 전 세계를 후끈 달아오르게 한 빅매치는 막상 뚜껑이 열리면 식상한 결과로 막을 내리곤 한다는 그 징크스 말이다. 마치 ‘소문난 잔치엔 먹을 게 없다’는 속담을 입증이라도 하듯 기대 이하의 경기내용으로 달아오른 팬심(心)에 찬물을 끼얹는 통에 기분이 영 찜찜하다. 지난 27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40·미국)와 코너 맥그리거(29·아일랜드)의 세기의 대결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

49전 무패의 최고 복서와 이종격투기 최고봉 UFC 두 체급 챔피언의 맞대결은 “누가 더 셀까”라는 격투 스포츠의 가장 원초적인 호기심과 맞물려 전 세계를 들끓게 했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는 메이웨더의 10라운드 TKO승으로 마무리됐다.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치열함도 없었고 그저 비난에서 면피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적당히 타협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건 스포츠가 아니라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움직인 쇼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팬도 더러 있었다. 한계를 뛰어넘고 최선을 다하는 스포츠맨십이 사라진 경기는 더 이상 스포츠가 아니라는 믿음에서 나온 지청구였다.

인간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잠재된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주장은 한 번쯤 귀담아둘 만하다. 인간의 태생적 한계는 생명의 유한성이다. 한 번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기에 늘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늘 의식의 기저에는 불멸에 대한 갈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게 여러 인문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스포츠에 대한 인간의 팬터지는 바로 불멸에 대한 갈망과 맞닿아 있다. 한계를 뛰어넘는 스포츠의 본질과 불멸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결과적으로 지향점이 똑같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스포츠의 본질은 급격히 변해가고 있다. 스포츠가 자본주의에 대한 선택적 친화력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상업화의 정도가 임계치를 넘으면서 그 부작용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상업주의가 판을 치면서 스포츠가 담아야내야할 숭고한 가치는 어느덧 타자화되고, 천박한 자본의 욕망이 기승을 부릴 뿐이다. 메이웨더와 맥그리거의 대결만 해도 그렇다. 전 세계 220국 10억명이 이 경기를 시청하면서 두 선수의 대전료 등 총 수입은 물경 3억달러(3300억원)로 추산됐다. 메이웨더는 한 대 맞을 때마다 19억여원을 챙겼고, 맥그리거는 6억여원을 벌었다고도 한다.

인간의 공격적 본능을 순치시켜 제도화한 격투 스포츠는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인기가 높다. 가장 본능적이면서 가장 솔직하면서도 가장 평등한 스포츠에 보내는 인간의 열광은 ‘날것 그대로의 순수함’에 보내는 헌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 순수성이 스포츠의 과도한 상업화에 의해 밸런스를 잃었다. 주체하지 못할 돈의 가치가 스포츠의 본질적인 가치를 뛰어넘는 가치의 역전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가치의 역전이 볼러온 예견된 졸전, 메이웨더와 맥그리거의 세기의 대결에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현대 스포츠의 어두운 그림자가 숨어 있는 것이다.

거품만 가득 낀 세기의 대결에선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오로지 상대를 무너뜨려야 하겠다는 일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몸 안에 남은 땀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집중과 몰입, 그리고 한계를 뛰어넘는 투지가 실종된 격투 스포츠는 더 이상 날 것 그대로의 순수한 스포츠가 아니다. 진실한 승리보다 비겁한 이익이 더 큰 목표로 자리잡을 수 있는 구조에선 스포츠의 순수성과 페어플레이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가치의 역전은 ‘세기의 대결’을 ‘세기의 졸전’으로 만들어버렸다. 선수들은 돈을 얻었지만 팬은 실망감만 얻었다. 스포츠는 순수성과 믿음을 잃었다. 가치를 상실해가고 있는 현대 스포츠, 위기의 파고는 더욱 높아지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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