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열의 부시리그

[LA=스포츠서울 문상열전문기자] 2003시즌 가을 야구장 외야에는 때아닌 대형 잠자리채가 등장했다.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의 신기록 홈런볼을 잡으려는 팬들이 빚은 진풍경이었다. 이 해 이승엽은 KBO리그를 넘어 아시아 한 시즌 최다인 56개 홈런을 쏘아 올렸다.

KBO리그에서 모든 것을 이룬 이승엽은 메이저리그 진출을 모색했다. 2004년 28살에 불과했다. 전성기가 한참 남아 있을 때였다. 삼성 구단도 외국 진출을 허락했다. 이승엽의 MLB 진출에 대해 서부 명문 LA 다저스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다저스에는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미국 진출에 영향을 준 안병환 스카우트가 한국 담당으로 재직했다.

이승엽과 부인 이송정 씨도 미국 진출에 큰 관심을 갖고 다저스 구장에서 가까운 글렌데일 주택도 보러 다녔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됐고, 방향을 일본으로 돌렸다. 일본 프로야구 지바 롯데와 계약을 맺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이승엽이 MLB에 진출했으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배트 스피드, 타격 임팩트, 클러치능력 등 역대 대한민국이 배출한 최고 타자라는 데 의심하지 않는다.

협상 결렬 이유는 메이저리그 개런티 계약을 보장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프링트레이닝캠프에서 기량을 점검한 뒤 개막전 엔트리에 포함시키는 마이너리그 계약이었다. ‘국민타자’로 칭송받은 그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개인 이승엽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17년이 흐른 2020년 세밑, 다저스 라이벌 샌디에고 파드레스는 키움 히어로스 내야수 김하성과 4년 2800만 달러(304억6400만 원) 개런티 계약을 맺었다. 연봉 700만 달러(76억 원)다. 역대 포스팅으로 진출한 선수로는 최고액이다. 샌디에고는 키움에 포스팅비로 이적료 500만 달러까지 부담해야돼 총 3300만 달러(359억 원)를 김하성에 투자하는 셈이다.

이번 계약은 김하성 개인 기량도 뛰어나지만 KBO리그의 위상이 그만큼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7년 전 이승엽의 아시아 최다 홈런은 눈여겨 보지도 않았던 MLB다. 한마디로 “그래서 뭐(So what!)” 분위기였다. 그러나 25세의 김하성이 포스팅으로 FA 시장에 나왔을 때 2020년 KBO리그에서 타율 0.306, 출루율 0.373,OPS 0.866, 홈런 30개, 타점 109개를 기록했다는 것을 소상히 밝혔다. KBO리그 기록도 MLB에서 고려하는 중요한 잣대인 것이다.

2009년 뉴욕 메츠와 일본 지바 롯데 감독을 역임한 보비 발렌타인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풀타임으로 뛰는 선수는 MLB에서도 통한다“며 일본 프로야구 수준을 MLB와 큰 차이가 없음을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일본 선수들이 쉽게 MLB로 진출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KBO리그 위상도 격세지감일 정도로 높아졌다. KBO리그에서 활동한 외국 선수들이 다시 MLB로 유턴하는 게 이와 무관치않다. 이제 과제는 김하성이 내야수로 얼마나 성공할지 여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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