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한국 프로야구에서 ‘컴퓨터 제구의 전설’로 불렸던 투수 임호균(59).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해 90년 은퇴할 때까지 컴퓨터같은 제구로 태평양 돌핀스에서 부동의 에이스로 활동했던 그가 요즘엔 생활체육을 위해 뛰고 있다. 미국에서 스포츠마케팅학을 전공한 것을 계기로 지난해부터 생활체육 야구계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체육행정가로 거듭나 생활체육과 우리나라 야구 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다는 왕년의 프로야구 스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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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골소년, 컴퓨터 제구력을 갖기까지
초등학교 4학년, 몸이 작고 허약했던 임호균은 삼촌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해 야구 명문 인천고 시절,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고3 때는 전국대회에서 ‘노히트 노런’을 두 번이나 기록했다. 그가 마운드에서 던진 공으로 홈 플레이트 위의 담배 불씨를 끈 일화는 아직도 인천고의 신화로 전해오고 있다.
그의 자로 잰 듯한 날카로운 제구력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아직도 ‘명품’으로 기억된다. 이에 대해 그는 “체구가 작은 것을 극복하기 위해선 칼 같은 제구력을 구사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흡족할 때까지 몇 천 번이고 공을 던졌다”라며 “같이 연습하며 공을 받는 선수는 글러브 값이 꽤 들었을 것이다”라며 웃었다.
1990년 은퇴하며 임호균은 다양한 시도를 펼쳤다. 프로야구선수 최초로 ‘임호균의 야구교실’을 열며 야구 꿈나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고, 선수출신 최초의 야구해설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미국 플로리다주 세인트 토마스 대학에서 스포츠마케팅학과 행정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지난해 귀국한 그는 서울 잠실에다가 자신의 이름을 딴 ‘베이스볼아카데미 & 클리닉’을 열어 부상으로 활동이 어려운 선수들에게 재활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생활체육 행정현장에서 일하고 싶다”
귀국후 임호균의 인생 후반전은 생활체육에 집중된다. 생활체육 홍보대사로서, 국민생활체육전국야구연합회 이사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요즘은 더 나아가 체육행정가로서 생활체육 현장에서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미국에서 배운 스포츠마케팅학 이론과 선진 체육행정 경험을 생활체육 현장에 쏟아 붓고 싶은 것. 체육행정을 맡아서 사무를 처리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야구 발전을 위해서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는 “생활체육 야구현장에 가보면 야구인들과 야구동호인들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다. 그들의 절박함을 정부나 체육단체에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 이들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정책적으로 피드백하지 않는다면 생활체육이 발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생활체육의 발전을 위해 그는 미국의 스포츠파크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미국에는 동네마다 스포츠파크가 설립돼 있어 주말이면 가족 단위로 스포츠를 즐기며 바비큐도 즐긴다”며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생활체육을 할 장소를 찾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서 여가와 함께 가족이 즐길 수 있는 레저공간을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인천이나 경기권에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것이 그의 생각이다.
유인근기자 ink@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