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조은별기자] “저도 나이가 들었는데 언제까지 청순가련, 첫사랑 연기만 할 수 있겠어요.”

배우 명세빈은 1990년대 후반을 풍미한 ‘책받침 여신’이었다. 1996년 신승훈의 뮤직비디오 ‘내 방식대로의 사랑’ 여주인공으로 발탁된 후 특유의 청순하면서도 세련된 외모로 뭇남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최근 김고은, 박소담 등 젊은 층의 사랑을 받고 있는 ‘무쌍’(쌍꺼풀 없는 눈) 연예인의 원조기도 하다.

그런 그가 JTBC ‘닥터 차정숙’(이하 ‘차정숙’)에서 불륜녀 최승희를 연기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더욱이 명세빈이 처음부터 최승희 역에 낙점된 것도 아니었다. 다른 배우가 고사한 역을 ‘책받침 여신’ 명세빈이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하하, 제 나이가 몇인데 언제까지 청순가련한 역할만 하겠어요. 저도 배우로서 제 능력을 확장하고 다른 색을 표현하고 싶은 갈급함이 있었죠. 승희 역에 다른 배우가 낙점된 것도 알고 있어요. 이 배우, 저 배우에게 의사를 타진했지만 결국 제게 돌아왔죠.”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하고픈 마음이 컸던 명세빈은 승희를 도도하고 시크한 인물로 설정했다. 특유의 해사한 느낌 대신 차갑고 이지적인 말투로 당당한 전문직 여성을 표현하며 구산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인 승희를 완성했다.

승희가 대학시절 첫사랑이자 동료교수인 서인호(김병철 분)와 부적절한 관계로 엮이는 부분은 마지막까지 명세빈의 마음 한구석을 짓눌렀다. 그는 승희의 전사를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의 큰 기대 때문에 오히려 가족에 대한 결핍을 지닌 인물”이라고 설정했다.

“아마 승희에게 인호는 사춘기를 지나온 뒤 처음으로 속내를 털어놓는 사이가 아니었을까요. 그런 인호가 정숙(엄정화 분)과 하룻밤으로 아이가 생기고 결혼까지 했으니 자격지심이 생겼을 것 같아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다시 인호를 만났는데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첫사랑이었다는 이유로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된 거죠. 집착이라기보다 인호를 향한 미련, 가족에 대한 애정이 결핍된 상처, 아이에게 아빠를 만들어주고픈 사연 등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인호를 놓지 못한 것 같아요.”

승희의 결핍을 발견하고 보듬으며 연기한 인간 명세빈에게도 결핍이 있을까. 그는 단연 배우자를 꼽았다. 여전히 가정을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는 명세빈은 “싱글이다보니 엄마 역을 연기할 때 부족함을 느끼곤 한다”라고 털어놓았다. 공교롭게도 그는 최근까지 자신과 결혼을 사칭한 한 대리운전기사 때문에 고통받기도 했다.

“제가 MBC ‘결혼하고 싶은 여자’(2004)라는 드라마도 찍었잖아요. 지금도 ‘결혼하고 싶은 명세빈’입니다.(웃음) 좋은 점도 있어요. 가정을 꾸리지 못한 결핍이 제 자신을 더 성장시키고 타인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요즘은 배우자에 대한 가치관이 좀 변했어요. 예전에는 상대방의 좋은 면만 바라봤다면 이제는 안 좋은 면도 받아들일 수 있고, 서로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명세빈에게 ‘차정숙’은 배우로서 과거의 영광에 갇히지 않고 인생 2막을 열어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과거 체력이 좋지 않아 ‘밤샘 촬영’이 많았던 드라마 촬영을 고사하다보니 어느 순간 명세빈은 젊은 세대에게 잊힌 배우가 되고 말았다.

“세대가 변한 걸 느껴요. ‘나 명세빈인데 나를 몰라?’보다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동안 뚜렷하게 보여준 게 없으니까요. ‘차정숙’ 방송 후 민낯으로 외출했는데 한 가게의 젊은 직원이 ‘혹시 명세빈 씨 아니세요?’라고 물었을 때 정말 감동받았어요. 그렇게 젊은 분이 저를 알아볼 줄 몰랐거든요.(웃음) 이 작품을 통해 MZ세대가 저를 새롭게 기억해주셨으며 좋겠어요.”

스무살 어린 나이에 데뷔했을 때만 해도 연기자로 30년을 살 줄 몰랐다는 명세빈은 4050 여배우들이 TV에서 맹활약하는 최근의 풍토에 대해서도 반가움을 표했다.

“스무살에는 배우가 꿈이 아니었어요. 생각지도 못한 인기를 얻고 얼떨결에 배우가 돼 정신없이 20대를 보냈죠. 지금은 이 일을 감사하게 생각해요. 신체적으로 나이는 들었지만 요즘 4050 여배우들의 드라마 성과가 좋고 기대수명도 커졌으니 또 다른 문화가 생기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어요. 아쉬움이 동력이 되는 만큼 다음 작품에 빨리 임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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