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효상이 빚은 두 개의 사색 공간 ‘양평 메덩골 & 군위 사유원’
- 화려한 장식 걷어낸 겨울 정원, 건축과 자연의 민낯을 마주하다
- 선곡서원의 ‘독락(獨樂)’과 명정의 ‘침묵’…나를 채우는 비움의 미학

[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겨울 숲은 정직하다. 봄과 여름 내내 자신을 치장했던 잎과 꽃을 미련 없이 떨구고, 앙상한 가지라는 ‘뼈대’만을 세상에 드러낸다. 화려한 색채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건 본질(Essence)이다. 그래서일까. 진정한 사색가들은 땀 흐르는 여름보다 옷깃을 여미는 겨울에 정원을 찾는다. 차가운 바람 속에 홀로 서서, 자연과 건축이 빚어낸 ‘침묵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이번 겨울, ‘사유(思惟)의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주목해야 할 두 곳이 있다. 바로 경기도 양평의 ‘메덩골정원’과 경북 군위의 ‘사유원’이다. 두 곳은 단순한 수목원이 아니다. 자연 속에 철학적 화두를 던져 놓은 거대한 예술 작품에 가깝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빈자의 미학(Beauty of Poverty)’을 주창해 온 건축가 승효상의 숨결이 공통분모처럼 흐르고 있다.
◇ 메덩골정원, 니체의 철학이 흑백의 수묵화로


지난 여름,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철학을 테마로 문을 연 메덩골정원은 겨울을 맞아 완벽한 변신을 꾀했다. 푸른 녹음이 우거졌던 한국정원은 눈이 내리면 거대한 흑백의 수묵화가 된다.
승효상이 병산서원을 모티브로 설계한 ‘선곡서원’은 겨울의 스산함 속에서 오히려 그 기품이 도드라진다. 잎이 진 나무들 사이로 건축물의 직선과 곡선, 그리고 낡은 기와의 질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서원 한가운데 솟은 ‘독락(獨樂)의 탑’은 이름 그대로 ‘홀로 즐기는 즐거움’, 즉 고독의 가치를 역설하는 듯하다.
콘크리트와 목재가 결합된 메덩골의 건축은 겨울 햇살을 받아 시시각각 다른 표정을 짓는다. 화려함이 사라진 겨울 정원에서 관람객은 비로소 ‘미음완보(작은 소리로 시를 읊조리며 천천히 걷음)’의 참맛을 알게 된다. 다가오는 봄, 니체의 초인 사상을 담은 ‘현대정원(디오니소스, 위버하우스)’이 그랜드 오픈을 앞두고 있어, 지금의 고요함은 마치 봄을 기다리는 산실(産室)의 엄숙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사유원, 깊은 침묵 속에 나를 가두다


메덩골이 니체 철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정제된 사색의 공간’이라면, 군위 사유원은 광활한 자연 속에 건축을 점점이 박아놓은 ‘거대한 사유의 숲’이다. 약 32만㎡(10만 평) 규모의 산자락에 조성된 이곳 역시 승효상의 건축이 중심을 잡는다.
사유원의 겨울은 처절하리만치 아름답다. 특히 승효상이 설계한 ‘명정(瞑庭)’은 겨울 사색의 백미다. 붉은 코르텐강 벽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면, 오직 하늘과 나무, 그리고 물소리만이 존재하는 침묵의 공간을 마주한다. 잎 떨어진 겨울나무 사이로 보이는 사유원의 풍경은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일깨운다.
겨울바람이 코르텐강 벽을 스치며 내는 소리는 마치 구도자의 독경 소리 같다. 메덩골의 선곡서원이 선현의 지혜를 구하는 공간이라면, 사유원의 명정은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공간이다. 두 곳 모두 ‘채움’보다는 ‘비움’을, ‘관광’보다는 ‘성찰’을 권한다.
◇ 겨울 정원이 건네는 위로


메덩골과 사유원, 두 정원은 닮아 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건축을 낮추는 겸손함이 그렇고, 걷는 이에게 끊임없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철학적 깊이가 그렇다.
여름의 정원이 눈을 즐겁게 했다면, 겨울의 정원은 마음을 씻어준다. 건축가 승효상은 “건축은 인간의 삶을 조직하는 것”이라 했다. 이 두 곳의 겨울 정원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의 삶을 다시 조직해 볼 기회를 얻는다.
차가운 공기가 머리를 맑게 하고, 앙상한 나무가 생명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계절. 이번 주말에는 양평으로, 혹은 군위로 떠나보자. 그곳에 가면 겨울이 빚어낸 뼈대 있는 아름다움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라, 온전히 나 자신과 만나는 특권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socool@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