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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 제도개혁에서 신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흔히 제도는 내용을 담는 그릇에 비견되곤 한다. 따라서 틀을 바꾸는 제도의 변화는 그 틀에 담기는 내용의 질적 변화를 수반하는 중차대한 일인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게 동서고금의 진리다. 지난해 단행된 체육단체 통합은 분절된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을 한데 아우르는 진폭이 큰 변화로서 한국 체육사의 일대 전환점으로 불릴 만했다. 선순환적인 새로운 체육 생태계를 만드는데 제도 개혁은 필수적이었지만 졸속이 빚은 치명적인 오류가 발견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가 밀어붙인 체육단체 통합과정에서 대한체육회장 선거와 각 종목단체 회장 선거방식의 변화는 나름 큰 의미가 있었다는 평가다. 종전 20명 남짓한 대의원 선거방식에서 100명이상 300명이하의 선거인단 방식으로의 전환은 체육의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진일보한 대안이라는 데 별 다른 이견이 없어 보였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간과했던 치명적인 약점이 툭 튀어나왔다.

선거인단을 구성해 회장을 뽑는 방식은 이해관계로 결탁한 소수의 대의원들이 체육단체를 사유화하는 고질적인 병폐를 뿌리뽑기 위해 고안됐다. 그러나 체육단체 통합과 제도개혁이 위로부터 강압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선거인단 제도의 도입은 대표성 확보라는 가장 중요한 알맹이를 놓치는 우를 범했다. 종전 대의원 선거방식은 재적의원 과반수 참석을 통해 성원(成員)을 충족시킨 뒤 출석대의원 과반수 이상의 표를 얻어야 당선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뀐 선거인단 제도는 다양한 체육 주체들의 선거 참여에만 신경쓰면서 당선 요건에서 투표참가율이라는 핵심사항을 빠뜨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현행 제도에선 100명이상 300명이하의 선거인단만 구성되면 선거가 유효하며 다득표자가 당선되는 것으로 규정이 바뀌었다. 최악의 경우 100명이 넘는 선거인단이 구성된 뒤 단 3명이 투표에 참여해 2표를 얻더라도 당선되는 상식밖의 케이스도 생길 수 있게 됐다.

체육단체 통합이라는 설정된 목표를 향해 쉼없이 달려가느라 많은 걸 놓쳤다.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려하고 제도변화의 근본 취지를 심도있게 고민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대부분 치명적인 실수는 현실에선 잘 이뤄지지 않는 게 상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것도 가장 비난을 받고 있는 문제단체가 보란 듯 치명적인 오류를 현실화시켜 사태의 심각성을 더욱 키웠다.

선거인단 제도의 치명적인 오류를 현실로 폭발시킨 회장 선거는 대한승마협회에서 발생했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 사태의 시발점이 된 대한승마협회장 선거였기에 파장은 더욱 컸다. 지난 4월 27일 전임 박상진 회장의 중도 사퇴로 열린 대한승마협회장 보궐선거에 단독 입후보한 손명원(76) 후보는 대표성마저 확보하지 못한 저조한 투표율에도 당선되는 우스꽝스런 일이 벌어졌다. 125명의 선거인단 중 단 35명이 선거에 참석해 33표를 얻었지만 제도의 허점을 비집고 당선의 영광(?)을 맛봤다. 손 후보를 뒤에서 민 인사들이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의 주역이라 대부분의 선거인단이 선거를 보이콧했던 상황을 떠올리면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대한체육회 관계자도 “다양한 체육인들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도입한 선거인단제도가 오히려 그 취지를 살리지 못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안고 있어 개선이 불가피하다”며 바뀐 선거인단제도의 허점을 인정했다.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도 체육개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선거제도 변화가 오히려 체육개혁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다.

모든 문제의 출발점은 상식이다. 상식에 반하는 위대한 제도변화는 단 하나도 없다. 바뀐 체육단체장 선거제도에서 빠뜨린 치명적인 실수는 선거인단 투표참가율을 명시하지 않은 점이다. 3명이 선거에 참여해 2명의 찬성으로 뽑힌 회장의 대표성을 과연 누가 인정할 수 있을까. 체육단체장 선거가 적어도 50% 이상의 선거인단 투표 참가율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그건 개선이 아니라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는 개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부국장 jhkoh@sportsseoul.com